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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광주청문회」지상중계|"군부 사조직 단결 저해요인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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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 광주특위가 21일 박준병(당시 20사단장)·정웅(당시 31사단장)·서명원(당시 전남대학생과장) 씨의 증언을 듣는 것으로 일단 금년도 청문회활동을 매듭지었다.
박준병씨 증언
◇조찬형 의원(평민) 신문
-육군출신 인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회」에 육사12기인 증인·박희도씨·박세직 안기부장 등이 회원이 아닌가.
『회원이다』
-증인 등 하나회 멤버들이 12·12사태와 5·18의 주역으로 5공 탄생에 공로가 크다고 들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직책과 계급에 따라 관련되는 것이다.』
-하나회의 정체는.
『내가 70년쯤부터 서울근무를 시작하며 가까운 사람인 박희도·박세직씨를 자주 만나 식사를 한 정도였다. 하나회는 정치집단은 아니며 하나회 멤버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자주 만났다는 말도 있으나 나는 사적으로 박대통령을 만난 일이 없다. 하나회는 73년에 없어졌다.』
-군부 내에 사조직은 군의 사기와 단결을 저하하는 나쁜 요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79년 12월 8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화를 받았는가.
『사령관이 아니라 부관을 통해 12월 9일 10시쯤 집에 와서 차 한잔하고 가라는 전달을 받았다.』
-12월 9일 전씨 집에서 전씨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 조사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는가.
『보안사령관이 12월 12일 저녁 6시30분쯤 퇴근하는 길에 30경비 단에 혼자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참모총장을 수사하는 관계로 얘기할 게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12일 저녁 암호명 「생일 집 식사초대」의 30경비 단 경복궁모임에 참석했는가.
『그런 암호는 모르며 저녁 6시40분쯤 경복궁에 도착했다.』
-30경비 단 모임의 참석자는.
『차규헌 수도군단장·유학성 군수차관보·황영시 1군 사령관·최세창 공수여단장·김진영 33경비단장 등이다.』
-노태우 장군도 있었나.
『내가 도착하기 조금 전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있다.』
-경복궁모임 참석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는가.
『승인을 받을 이유가 없다.』
-군 주요지휘관이 모인 이유가 뭔가.
『보안사령관은 안 계셨고 총리공관에 가서 참모총장을 수사하기 위한 결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재가없이 참모총장을 체포했고 박희도 씨는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고, 노태우 사단장은 중앙청에 출동했으며, 수도경비사령관·특전사령관등이 불법 체포된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일부는 그때 알았고 일부는 나중에 들었다.』
-그 날밤 증인의 20사단은 동원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보안사령관의 이동요청은 없었는가.
『이동요청은 없었으며 동원되지 않았다.』
-12·12사태에 대한 평가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수사연장 선상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작당해서 무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것으로 군형법의 반란죄에 해당, 증인도 공범으로 처단돼야 마땅하지 않는가.
『반란은 목적과 사전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잘 모르고 부관도 안 데려갔다. 12·12사태는 우발적이고 불가피한 사태였으며 사대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당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시해 사건에 이용당한 것은 사살이며 그의 기회주의적 행동에 대해 군내 부에서 상당한 이야기가 있었다.』
-증인이 광주항쟁을 알게된 것은 언제인가.
『5월 15일 서울에 와있어 신문을 통해 알았으나 현지의 실제 어려운 상황은 잘 알지 못했다.』
-증인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 실제상황은 어떠했나.
『5월 20일 제3한강교 근처에서 식사를 하다가 총장의 지시를 받고 급히 들어갔더니 먼저 1개 연대를 보내라고 했다. 바로 이어 사단사령부와 또 1개 연대를 보내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5월 21일 2시30분 기차를 타고 9시에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시가 넘어 CAC(전교사) 사령부에 가 윤흥정 장군에게 신고를 했다. 당시 윤 장군의 초조하고 답답한 모습, 많은 장교들의 침통한 모습을 통해 당시 상황을 느끼면서 착잡한 감을 가졌다.』
-증인은 CAC연병장에서 조국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있으며 6·25이후 최대의 위기에 처해있다면서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국민의 군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어째서 당시를 6·25이후 최대의 위기로 봤느냐.
『정말로 많은 유언비어가 있었고 21일엔 군이 철수를 했다. 광주가 어디 남의 땅인가 그곳에는 80만이 남아있었다…』
(박씨가 길게 설명하려 하자 문동환 위원장이 답변을 제지했으며 이 때문에 의원들 사이에 한때 언쟁이 벌어졌다)
◇오경의 의원(민주) 신문
-20사단장으론 언제 근무했으며 20사단의 임무는 무엇인가.
『79년 8월부터 80년 7월까지 근무했다. 20사단은 원래 야전군의 유일한 예비부대로 수도권 계엄 때는 통상 20사단이 나오곤 했다.』
-증인은 5·17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는데 누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나.
『5월 16일 육본서 연락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회의참석자가 군단장 급 이상이던데 사단장인 증인은 어떻게 참석했나.
『계엄분소장 급 이상의 관계자가 참석한 게 이유인 것 같다. 20사단이 육군의 유일한 기동계엄 예비사단이라서 참석시킨 것 같다.』
-그러면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은 계급도 높고 직책도 중요한데 왜 참석하지 않았나.
『잘 모르겠다. 아마 중정부장서리고 해서 안 나온 게 아닌가 여겨진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감은.
『광주사태는 6·25이후 최대의 비극이다. 명에 의해 광주로 나갔지만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어린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군의 신뢰회복 방안은 무엇이냐.
『광주시민·경찰·우리군인에 대해 정말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갖고 있다. 광주시민이 최대 피해자고 국민·군도 피해자이며 양심세력·보수세력도 피해를 보았다. 공권력을 집행하고 있던 쪽에 있는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옥만호 의원(공화) 신문
-어제 유병현 증인은 20사단을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에서 제외된 부대라 했고 증인은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명확히 해달라.
『육군의 명령을 받았다. 26월26일 이동 도중 CFC로부터 작전통제권 이양을 승인 받았다는 것을 통보 받았다.』
-20사단의 평시 및 비상시 임무구분은.
『평시에는 연합사 예비부대이며 침투작전 시에는 3군 소속이 된다.』
-당시 60연대와 포병대가 원대 복귀되면서 자동적으로 작전통제권이 CFC로 넘어갔나. 『그렇다.』
-1차로 60연대와 포병단의 작전통제권이 CFC로 넘어갔고 2차 복귀한 61, 62연대는 통제권밖에 있었다는데.
『2월 5일자 육본명령에 의해 원대 복귀했으나 작전통제권은 CFC에 인계되지 않은 채로 복귀했다.』
-80년 5월 20사단의 서울 재 출동 시 전 사단이 이동했는데.
『1차로 61, 62연대만 옮기고 작전통제권이 CFC에 있는 60연대와 포병단은 5월16일 CFC와 육본간 협의 후에 서울로 이동했다.』
-20사단의 인명피해는.
『21일 도착해 6월 27일까지 한 달여 있으면서 시민과 총을 갖고 서로 충돌한 것은 21일 저녁 광주·목포간 도로의 고개, 21일 오후 5시 광주 도병원 앞, 진압직전 오후 송정리에서, 27일 마지막 진압작전 등 4차례인데 이 과정에서 20사단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시민 10명, 부하 2명이며 부하 중 11명의 부상자도 있었다.』
-군부대의 자위권 발동명령은.
『21일 오후 8∼9시 사이에 전교사로부터 받았다. 「먼저 경고하라」 「하퇴부를 쏘라」는 등의 내용도 있었다.』
-작전지시는 어디서 받았나.
『전교사다.』
-도청투입은.
『27일 3개 연대가 모두 투입됐으나 나중에 확인하니 도청에 들어간 부대는 20사단의 경우 61연대 1대대 1중대였다. 중대장은 조치규 대위로 광주출신이다.』
-20사단이 광주작전에 깊이 개입한데 대한 책임과 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6·25이후 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심명보 의원(민정) 신문
-광주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은 무장하고 있었나.
『몽둥이만 들고 있었으나 사람이 많았다.』
-무기는 탈취 당하지 않았나.
『M60이 있었는데 들고 나왔고 실탄만 남아 있었다.』
-장병의 소극적 태도는 어떻게 평가하나.
『전교사에서 안내만 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다.』
-어제 권승만 증인은 정웅 장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진압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해 광주시위가 격렬해진 이유를 밝혔는데 이런 지휘가 가능한가.
『통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게 관례다.』
-증인에게 모함 섞인 별명이 붙은걸 아느냐.
『안다.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다. 84년 군복을 벗고 그해 말 선거에 나서면서부터 이런 말이 나와 외신에도 여러 얘기가 나왔으나 부정확한 얘기들이다.
만약 우리사단이 가혹행위를 했으면 지금 양심선언을 하라. 본 사람은 신고하라. 역사 앞에 책임을 지겠다.』
-광주치유책은.
『부대복귀 후 총장에게 지역감정 때문이라며 10∼15년 내 전라도 출신 총장을 내자고 했다. 나름대로 이런 일을 위해 노력해왔다. 사회전반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선 정통성 있는 정부, 도덕성 있는 정부가 목표며 자유민주주의를 세워야한다. 어제 사면·복권조치로 한 시대는 마감됐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정통성을 만드는 일에 나도 참여하고 싶다.』 <4면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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