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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불편한 전기요금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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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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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쓴만큼 돈을 더 내는 게 상식인 줄 알았다. 전기요금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깎아주는지, 그리고 깎아줘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찔끔’ 인하했다며 여론이 들끓는 게 의아했던 이유다. 폭염 국면에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 적잖은 동료 선후배들로부터 “감 떨어지는 소리”라고 욕만 먹었다. 민심과 동떨어진 생각을 반성하는 한편 호기심이 발동했다. 다들 평소에 전기요금을 얼마나 내길래, 아니 이번 여름에 얼마를 더 내야하길래 가구당 1만~2만원 깎아주는 걸 생색내기라며 불만스러워할까.

박근혜 정부 시절, 손해보다 혜택 많게 이미 개편 #문재인 정부가 제대로 알리지 않고 공포 키워

궁금해하던 차에 7월분 관리비 청구서가 집에 날아왔다. 서울의 열대야가 7월 22일부터 8월 16일까지 이어졌으니 폭염이 제대로 반영된 것도 아닌데 전기요금은 전 달(1만5450원)의 7배쯤인 10만580원이었다. 한전이 공개한 ‘10만원 이상 급증한 최상위 1.4%’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밤새 튼 에어컨 두 대 걱정이 너무 컸던 탓인지 치솟은 요금에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안도했다. 같은 크기에 사는 다른 집의 평균 요금도 11만3757원으로 우리집과 큰 차이가 없었다(내가 사는 아파트 관리비 청구서는 단지 내 동일면적 요금을 같이 보여준다). 다만 인상폭 차이는 컸다. 다른집이 5만5588원에서 두 배가 될 때 우리집만 일곱 배가 됐으니 말이다.

왜 우리집만 많이 올랐을까. 답은 폭염이 시작된 7월이 아니라 6월에 있었다. 맞벌이 부부와 고교생 아들 세 식구가 낮엔 거의 집을 비우고 잠 자기 전 두서너 시간만 집에 모이는 터라 평소 전기요금이 별로 안 나온다. 특히 올 6월은 이례적으로 더 적게(195㎾h) 써서 누진제의 가장 저렴한 요금(93.3원/㎾h)을 적용받았다. 7월 들어 밤새 에어컨을 트느라 다른 집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렴했을 뿐이다.

이번 달에 터무니없이 많이 낸 게 아니라 평소 누진제 혜택을 본 셈이다. 한전 통계를 확인해봤더니 우리집만이 아니라 전체 가구가 비슷한 패턴이었다. 2017년 전체 주택용 평균 판매단가(요금)는 ㎾h당 108.5원으로, ‘약탈적으로 싸다’는 산업용(107.41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무더위의 정점인 8월(127.43원)은 산업용(118.49원)보다 훨씬 비쌌다. 누진제로 전기 사용량이 많아지면 ㎾h당 요금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나마도 크게 덥지 않았던 2013년 한해 평균치(127.02원)와 비슷했다. 당시는 산업용(100.7원)과의 차이가 꽤 컸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으레 집에서 쓰는 전기는 집밖 전기보다 훨씬 비싸고, 특히 여름이면 징벌적 누진제가 무서워 웬만하면 에어컨 끄고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게 지금까지의 국민적 상식이었다. 막연한 상식이 짓누르던 전기요금 공포와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은 이렇게 괴리가 있었다.

이 간극엔 박근혜 정부의 누진제 개편이 있다. 2017년은 폭염으로 온 나라가 뒤집혔던 2016년보다도 주택용 연간 총 사용량이 더 늘었다. 하지만 일반 가정은 오히려 10.1% 더 적게 냈다. 2016년 여름에 4200억원이나 깎아줬는데도 말이다. 2016년말에 손본 누진제 완화 효과다.

개편 전엔 실제로 징벌적 요금 탓에 고통받았다. 지금은 400㎾h를 넘으면 얼마를 더 쓰든 ㎾h당 280.6원을 낼 뿐이지만 개편 전엔 400㎾h를 넘으면 417.7원, 500㎾h를 초과하면 709.5원을 내야 했다. 또 적게 쓰든 많이 쓰든 3배 차이인 현재와 달리 당시엔 11.7배나 차이가 나 에어컨 켜기가 꺼려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에너지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개편 후 1000㎾h 넘는 소비 가구의 요금이 절반 이상 낮아지는 등 누진제로 인한 요금 인하 효과를 거의 모든 가구가 보고 있다.

물론 아무리 요금을 내려도 안 쓰던 에어컨 돌리느라 크게 늘어나는 전기요금은 소득수준이나 생활패턴에 따라 여전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여름철 한두 달 요금 낮추자고 2년만에 다시 누진제에 손댔다가 자칫 평소에 더 내고 여름만 싸게 쓰는 조삼모사 요금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국민이 원하는 건 여름에 에어컨을 원없이 틀어도 평소와 다름없는 전기요금을 내고 싶은 것이지 평소에 전기요금 더 내는 게 아닐텐데 말이다. 이런 요구를 들어주려면 여름 전기요금만 따로 깎아줘야 한다.

2015년과 2016년 여름에도 올해처럼 각각 1300억원과 4200억원의 전기요금을 깎아줬다. 당시는 징벌적 누진제 보완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한전의 사정도 좋았다. 올해는 다르다. 누진제가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바뀐 데다 한전은 적자에 허덕이는데 정부가 객관적 숫자를 토대로 미리미리 국민들을 설득하지 않아 비판여론에 몰렸고, 허겁지겁 2761억원 깎아주고도 결국 욕만 먹었다.

홍보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문재인 정부답지 않다. 요즘 ‘뜨거운 감자’인 다른 통계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서인지, 아니면 전 정권 일이라 애써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올해 전례를 만들었으니 돌아오는 여름마다 같은 일이 반복될까 걱정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