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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름 투성이 제자가 벌써 회갑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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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4일 대전시청 스카이라운지에서 열린 대전고교 44회 졸업생 주최 ‘스승의 날’ 행사에 참석한 성선제(88) 전 대전고 교사가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대전=프리랜서 사진작가 이종탁

"마귀할멈(스승의 별명)이 나타나셨다. 아니, 오늘은 헤라클레스도 오셨네."(제자들) "야 이놈들, 너희가 벌써 회갑이라니…."(선생님)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오후 6시 대전시청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1965년 대전고를 나온 44회 졸업생들이 은사들과 만나는 날이었다.

1982년 '스승의 날'이 부활한 뒤 올해로 25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는 행사다. 이날 행사에는 생존한 스승 20명 가운데 15명이 참석했다. 최고령자는 93세다. 가장 '젊은' 스승은 73세다. 서부병원에 근무하는 김철기(60)씨는 "한때 30여 분에 달했던 선생님이 이제 20여 분만 남았다"며 "해가 갈수록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올해 대부분 회갑을 맞은 제자 60여 명은 이날만큼은 빡빡머리에 검은 교복을 걸친 고교시절로 돌아가 스승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회포를 풀었다.

◆ "오늘 때문에 산다"=스승 중 최고령자인 김형구(90.당시 교감.대전시 동구 인동)옹은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 29년치 중앙일보를 꼬박 모아 최근 대전시 학생도서관에 기증했다는 김옹은 "제자들이 매년 잊지 않고 불러주니 감개무량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년에도 꼭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국어 교사를 지낸 김영덕(78)옹은 서울에 거주하며 이날 대전으로 갔다. 김옹은 "1년 동안 이 모임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고전을 가르쳤던 정진칠(81.대전시 거주)옹은 "여드름이 덕지덕지했던 아이들이 머리가 허옇게 셌는데도 만나고 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유도를 가르쳤던 송재형(85)옹은 다리가 불편해 참석하지 못했다. 송옹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용석이(44회 동기회장)가 모시러 오겠다고 전화했지만 내가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라면서 아쉬워했다. 김순중 서울지역 동기회장은 "어떤 선생님은 갑자기 행사에 나오시지 않아 행방불명된 줄 알았는데 뒤늦게 찾고 보니 치매에 걸리셨더라"며 가슴 아파했다.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돈을 모아 93년 제주도 왕복여행권을 만들어 드렸고, 99년엔 종합건강검진을 받게 했다. 2004년엔 병고에 시달리는 은사들을 위한 모금운동도 따로 벌였다.

◆ "우리 시대엔 군사부일체"=김순중 서울지역 동기회장은 "스승에 대한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이기 위해 모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송용석 대전지역 동기회장은 "우리 시대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해서 스승을 부모님과 같이 소중한 인연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모임을 운영하다 보니 해가 흘렀다"고 회고했다.

성균관대 손동현 학부대학장은 "선생님이 술을 사주시면서 당장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인생을 멀리 보고 살라는 충고를 해주신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대전=최준호,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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