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江南人流] 우리는 지금 마켓에 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하루 3만 명. 일단 '마켓'이 열렸다 하면 몰려드는 인파다. 개최 시기는 일정치 않고, 장소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매번 달라지고, 별다른 홍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마켓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다시 열릴 날만 기다린다. 마켓에 목을 매기는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름난 마켓 기획자에겐 기업·브랜드 담당자들의 러브콜이 쏟아진다. 새로운 유통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는 마켓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띵굴시장·마르쉐@·골목시장·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곡도마·마미스팟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직접 들고 나와 판매하는 마켓 '농부시장 마르쉐@'를 찾은 손님의 모습. 최근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마켓'이 20~40대 여성의 발길을 끌고 있다.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직접 들고 나와 판매하는 마켓 '농부시장 마르쉐@'를 찾은 손님의 모습. 최근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마켓'이 20~40대 여성의 발길을 끌고 있다.

올해 5월 라이프스타일 마켓 ‘마켓움’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국산 먹거리와 장인들의 공예품을 소개하는 ‘마켓유랑’을 열었다. 그림 맨 위 공간은 마켓이 개최된 장소 ‘문화역 서울284’이다. 일러스트는 손정민씨 작품.

올해 5월 라이프스타일 마켓 ‘마켓움’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국산 먹거리와 장인들의 공예품을 소개하는 ‘마켓유랑’을 열었다. 그림 맨 위 공간은 마켓이 개최된 장소 ‘문화역 서울284’이다. 일러스트는 손정민씨 작품.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마켓(market)'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장·마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방의 ‘5일장’과 비슷하다. 기획자에 의해 장소와 날짜가 정해지면 미리 판매를 신청한 셀러(판매자)들이 공들여 만든 음식이며 물건을 챙겨 나와 판매한다. 다른 점은 5일장이 같은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데 반해, 마켓은 장소도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비정기적으로 열리지만 한 번 열릴 때마다 적게는 하루 5000명, 많게는 2만~3만명이 모일 만큼 집객파워가 대단하다. 모이는 사람 대부분은 20~40대를 중심으로 한 여성이다. 이는 취급하는 상품의 특성 때문이다. 이름난 마켓일수록 음식·주방·리빙 등 라이프스타일 관련 상품들을 주로 다룬다. 생산규모는 작지만 공들여 직접 만들거나 셀러의 취향에 맞춰 구성한 소품, 건강한 먹거리, 감각적인 디자인 제품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중고품 위주의 플리마켓(벼룩시장)과도 결이 다르다. 때문에 요즘 사용하는 ‘마켓’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라는 사전적 의미 대신,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거래 장소 또는 행사'란 의미가 더 강하다.
대형마트·백화점 등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을 다룬다는 점도 마켓으로 사람이 몰리는 이유다. 4살 아들을 둔 주부 신아름(34)씨는 마켓 마니아다. 주로 소스나 간식, 아기용품을 사는데 마켓에서만 볼 수 있는 음식 브랜드인 '말랭이여사' '메종드율' '시골여자의 바른먹거리'를 즐겨 찾는다. 신씨는 "다른 데선 볼 수 없는 믿을 만한 먹거리와 재미있고 실용적인 브랜드가 많다"며 "마켓이 열리는 장소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 나들이겸 자주 다녀온다"고 말했다.

축제야 시장이야…여자들의 놀이터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마켓은 ‘띵굴시장’ ‘마켓움’ ‘보부상 마켓’이 대표적이다. 띵굴시장과 마켓움은 개인 기획자가, 보부상 마켓은 상인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밖에 농부가 재배한 농산물을 직접 가져와 파는 '마르쉐@', 양평 지역 거주 예술가들이 모이는 '문호리 리버마켓', 제주도 플레이스 캠프 제주 호텔이 주최하는 '골목시장(제주)'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열린 '띵굴시장'의 모습.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열린 '띵굴시장'의 모습.

'띵굴시장' 마켓이 끝난 뒤 띵굴마님 이혜선씨(앞줄 중앙)와 참가 셀러들이 다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띵굴시장' 마켓이 끝난 뒤 띵굴마님 이혜선씨(앞줄 중앙)와 참가 셀러들이 다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국판 살림의 여왕' '프로살림러'로 불리는 이혜선씨는 이런 마켓 열풍의 주역이다. 세련된 살림 솜씨로 네이버 블로그 '그곳에 그집'을 운영하며 '띵굴마님'이란 닉네임으로 팬덤을 형성한 장본인이다. 마켓을 시작한 계기를 묻자 그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2007년부터 이씨가 올리는 살림 관련 게시물에 달린 댓글의 90% 이상이 '어디 제품이냐' '어디서 살 수 있냐'란 질문이었다. 일일이 답을 달아주다가 아예 판매자와 구매자를 한 장소에서 연결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2015년 9월 자신이 사용했던 상품 업체 25곳을 모아 마켓을 연 게 지금 국내 최대 마켓으로 손꼽히는 '띵굴시장'의 시작이다.
이씨가 띵굴시장에서 선보인 목공 장인 이규석 선생의 나무도마(은곡도마), 건강한 조리도구를 위해 주부가 직접 개발한 주물냄비(마미스팟), 김화중 공예가가 만든 모던한 도자기 그릇(화소반) 등은 마켓 손님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지금은 독립 브랜드로 매장을 낼만큼 성장했다. 띵굴시장은 그동안 규모가 점점 커져 25개였던 셀러 수가 3년 만에 200여 개로 늘어났다. 이달 말에는 부산에서 18번째 마켓 개최를 앞두고 있다.

지난 5월 마켓움이 공예진흥원과 함께 '문화역 서울 284'에서 개최한 마켓 '마켓유랑'.

지난 5월 마켓움이 공예진흥원과 함께 '문화역 서울 284'에서 개최한 마켓 '마켓유랑'.

마켓유랑에 방문한 사람들이 꼼꼼히 물건을 살펴 보고 있다. 대부분이 20~40대 여성들이다.

마켓유랑에 방문한 사람들이 꼼꼼히 물건을 살펴 보고 있다. 대부분이 20~40대 여성들이다.

마켓에서 유명세를 얻어 이달 한남동에 첫 번째 오프라인 매장을 내는 '은곡도마'.

마켓에서 유명세를 얻어 이달 한남동에 첫 번째 오프라인 매장을 내는 '은곡도마'.

손지민씨는 부산에서 마켓 문화를 이끌고 있는 유명인이다. "마켓에 사러 오지 마세요. 놀러 오세요"라고 말하는 그는 2015년 처음 '마켓움'을 시작했다. 몇몇 친구와 부산 기장 해변에서 캠핑 텐트 9개를 치고 카레 잘 만드는 친구가 만든 카레, 아는 동네 오빠의 어머니네 밭에서 딴 딸기, 자신이 모은 빈티지 물건 등을 내놓고 마켓을 열었다. 종일 참가자들과 재밌게 지낸 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여기 저기서 마켓 개최 요청이 밀려 들었고 결국 전문 마켓 기획자로 나섰다. 판소리를 전공한 그가 집중해 다루는 건 숨겨진 한국 공예품과 명인들이 만드는 먹거리다. 목공예 제품을 선보이는 '장스목공방' '선샤인파파', 전통장을 만드는 '이로움' 등이 대표적이다.
성공한 마켓은 발빠른 기업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로 진화 중이다. 마켓움은 지난 7월 패션기업 세정과 협업해 라이프스타일 편집 브랜드 ‘동춘상회’를 론칭했다. 띵굴시장은 외식업체 OTD와 손잡고 10월 초 서울 성수동과 을지로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온라인 마켓도 상시 운영한다는 소문이다.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농부시장 마르쉐@’ 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거래하고 있다. 20~40대까지 여성이 주요 고객들로 친구나 가족이 함께 나들이 삼아 찾는 경우가 많다.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농부시장 마르쉐@’ 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거래하고 있다. 20~40대까지 여성이 주요 고객들로 친구나 가족이 함께 나들이 삼아 찾는 경우가 많다.

'마르쉐@'에 나온 싱싱한 농산물.

'마르쉐@'에 나온 싱싱한 농산물.

‘농부시장 마르쉐@’에 참가한 ‘준혁이네’의 채소들. 인기 높은 농부팀 중 한 곳으로, 여러 품종의 채소를 키워 판매하는데 맛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해 늘 사람들이 붐빈다.

‘농부시장 마르쉐@’에 참가한 ‘준혁이네’의 채소들. 인기 높은 농부팀 중 한 곳으로, 여러 품종의 채소를 키워 판매하는데 맛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해 늘 사람들이 붐빈다.

'띵굴시장'을 통해 판로를 확보한 주물냄비 브랜드 '마미스팟'은 올해 초 백화점에 입점할 만큼 성장했다.

'띵굴시장'을 통해 판로를 확보한 주물냄비 브랜드 '마미스팟'은 올해 초 백화점에 입점할 만큼 성장했다.

마켓에선 셀러와 손님의 구분이 없다. 찾아온 손님뿐아니라 물건을 팔러 온 셀러 역시 물건을 사고 소통하며 즐긴다. 직접 디자인한 주물냄비를 판매하는 엄선희 ‘마미스팟’ 대표는 “물건을 팔면서 짬짬이 다른 셀러의 물건을 구경하고 많이 산다”며 “주로 아이가 먹을 과자나 육아용품을 사는데 어떨 땐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직원의 핀잔을 듣는다"며 웃었다. ‘시골여자의 바른 먹거리’ 운영자 양아현씨는 “직접 고객을 만나고 소통하는 게 마켓의 재미”란다.
셀러는 가져온 물건을 시간 안에 다 못 팔면 가격을 낮추거나 필요한 물건을 가져온 셀러와 맞바꾼다. 가져온 물건을 다시 가져가는 데 힘과 비용을 쓰느니 저렴하게라도 팔아 버리고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때문에 할인을 노리고 마켓 방문시간을 조절하는 사람도 상당하다.

'띵굴시장'의 홈페이지. 마켓 일정이 결정되면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에만 공지를 올린다.

'띵굴시장'의 홈페이지. 마켓 일정이 결정되면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에만 공지를 올린다.

마켓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안목 좋은 기획자가 엄선한 브랜드를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띵굴마님 같은 살림 전문가가 큐레이션 한 알짜 브랜드가 한 장소에 모이니 그의 살림 솜씨를 봐온 사람이라면 마켓에 가서 지갑을 열 수밖에 없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소장(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은 "취향과 안목이 검증된 주최자에 의해 큐레이션 된 상품에는 신뢰감이 생긴다"며 "20~40대 여성들은 이를 통해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찾기 힘든 소상공인과 공예가의 물건을 발굴해 소개하는 일도 마켓의 칭찬받을 만한 역할이다. 높은 수수료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백화점·마트 대신 마켓은 소상공인의 제품이 세상에 선보이는 데뷔 무대가 된다. 음식 브랜드 '메종드율'은 소스 200병을 만들어 마켓움에 참가했다가 유명해져 지금은 공장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이밖에도 '나무목' '화소반' '은곡도마' '마미스팟' '이로움' 등은 이미 마켓 업계에서 이름난 브랜드다.
이런 마켓의 인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향은 성신여대 교수(서비스디자인공학과)는 "모든 소비가 '집'으로 집중되고 있는 최근 트렌드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마켓이 다루는 브랜드가 ‘집 꾸미기’에 적합한 물건들로 여성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해 반나절 동안 시간을 보낼 장소와 즐거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도 마켓의 인기 비결이다. 김용섭 소장은 "흥겨운 장소이자 놀이 공간으로서 마켓이 제공하는 경험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마켓에서 물건만 거래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는 경험까지 즐긴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 역시 "마켓이 제공하는 경험은 부담 없고 재미도 있어서 환영받는다"고 봤다. 외식 공간 기획을 꾸준히 해온 손창현 OTD 대표는 "미국·유럽·일본 등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이 숍 대신 마켓을 찾는다"며 "향후 몇 년간 마켓의 인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