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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가 없는 위령비, 그리고 야스쿠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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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사상 최악의 폭염이 지속되던 지난달 말 원자폭탄 투하의 도시 히로시마(廣島)를 찾았다. 원폭 피해지역은 평화기념공원으로 바뀌어 두 줄의 문구가 적힌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편히 잠드십시오. 잘못은 반복되지 않으니까.”

원폭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후손들의 다짐이다. 그런데 문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자에게 누군가 “주어(主語)가 없다”고 지적해준다. 누구의 잘못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잘못인지 원폭을 사용한 잘못인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해석이다. 영어로는 ‘We shall not…’으로 되어 있으니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호하다.

이 위령비는 1947년 8월 6일 공개됐다. 14만 명의 희생자를 낸 원폭이 히로시마를 덮친 지 2년 만에 열린 첫 위령제에서였다. 하마이 신조(濱井信三) 당시 히로시마 시장은 “비문이 공개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반핵·평화를 맹세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어가 없는 위령비 문구는 곧바로 논쟁에 휩싸였다. 위령비가 세워진 해는 미군정 통치 시절이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주어를 모호하게 흐린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전쟁에 대한 반성은 외면하고 세계 첫 원폭 피해자임을 앞세우는 자들의 논리였다. 위령비는 평화공원 한복판에 놓여 있지만 논쟁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지난 15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난 참배객들 때문이었다.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아침부터 붐볐다. 놀라운 것은 어마어마한 일반인 참배객의 숫자였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땡볕 아래서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참배객들은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 조상들을 위해서”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전쟁을 일으킨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식민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린 결단”이라고 칭송했다. “몸 바쳐 싸운 조상을 뵐 면목이 없어 반성하기 위해 왔다”는 궤변에선 말문이 막혔다.

야스쿠니 신사 밖에서 군복을 입고 제국주의 코스프레를 하는 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전쟁의 광기’보다 태연함과 당당함이 느껴져 더 무서웠다.

내년 4월 퇴위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전몰자 추도식에서 기념사를 한 아키히토(昭仁) 일왕은 4년째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헤이세이(平成) 30년 동안 그가 염원한 것은 ‘평화’였다. 히로시마 공원에서, 야스쿠니 신사에서 본 평화는 주어도 본질도 다른 듯했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