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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의 퍼스펙티브

자유한국당, 김대중 체제 수용 없이는 미래 어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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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대중의 유산

우리는 점점 빨라지는 24시간 뉴스 사이클 속에 살고 있지만 오늘은 잠시 시간 여행을 해보자. 47년 전 봄 서울 장충단공원. 수십만 시민들 앞에선 40대의 젊은 대통령 후보는 특유의 연설 솜씨로 청중들을 웃고 울리고 있었다. 경제 성장과 막강한 권력 집중이라는 무기를 양손에 든 현직 대통령에 맞서 야당 후보는 그 후 수십 년간 우리 사회가 씨름하게 될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그 시절, 김대중 후보는 시대를 성큼 앞서가고 있었다. 1.“자유를 회복”해서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고 2.“지방자치제를 실시해서 민주주의의 기초를 확립하고” 3.“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고” 4.“4대국의” 보장 하에 “한반도 전쟁 억제하고” 5.“생산면의 자유 경제, 분배에 있어서 사회 정의를 실천에 옮”기고 6.“최저임금제”를 실시할 것을 역설하였다. (1971년 4월 18일 장충단공원 연설문)

산업화·민주화·세계화 거치면서 #정치·경제·사회구조의 프레임이 #박정희에서 김대중 체제로 이행 #보수세력은 87년 민주화 이후 #박정희 체제와 결별하지 않은 채 #부분적 치장과 변형에 안주해 #한반도평화, 생산·복지 선순환 등 #김대중 철학을 거부하는 보수는 #역사의 낙오자 될 수 밖에 없어 #진보는 김대중 철학 계승했지만 #이를 정책화하는 능력 떨어져 #경제정책의 난맥상 해소하려면 #‘상인의 현실 감각’ 조속히 길러야

1971년 김대중, 40년 후를 설계하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71년 김대중 후보가 제시했던 가치들은 민주화 30년을 넘어선 지금의 보수·진보세력들이 함께 완성해가야 하는 핵심 과제들이다. 민주주의, 지방자치, 주변국과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 평화, 복지와 생산의 선순환, 최저임금 등의 정치적 목표들은 오늘날 보통 시민들에게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다. (이러한 가치들의 보편성을 이해 못 하는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를 논외로 한다면)

단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놀라운 선견지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지난 50여년 산업화에서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거대 변화를 거쳐오면서 우리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중핵은 박정희 체제에서 김대중 체제로 이행했다는 점이다. 국가 주도의 발전, 남북 간 경쟁과 대결, 지역 간 불균형적 발전, 권위적 정치와 사회구조, 미국과의 후견 동맹 등이 박정희 체제의 핵심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저항하고 대안을 모색하면서 성장해온 것이 김대중 체제의 핵심적 지향점들이다. ①국가 주도 발전에 대한 대안이 곧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고 ②남북 대결에 대한 대안이 곧 주변국과 협력을 통한 남북 간 평화이다. ③박정희 시대에 선택했던 지역 간 불균형 발전 전략에 대한 대안이 지방자치였고, ④권위적 정치와 사회에 대한 대안이 바로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⑤그리고 후견(미국)-피후견(한국)구조의 한미동맹에 대한 김 대통령의 대안이 바로 실용적 한미동맹이었다. (그래픽 참조)

김대중 체제와 오늘의 보수·진보의 과제

이제 박정희의 국가 전략은 더는 작동하지 않고 김대중의 철학이 결국 승리했다는 역사의 심판을 쓰자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는 박정희 체제와 김대중 체제를 선과 악의 세계로 보려 한다. 다른 누군가는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불과 물의 관계로 보려 할 것이다. 대립의 이분법을 넘어 필자가 눈여겨보려는 것은 대조적인 두 체제의 상호 긴장과 학습을 통한 성숙과 극복의 변증법이다. 풀어 말하면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면서 김대중 철학이 다듬어져 왔고, 박정희 유산을 넘어서려 노력하면서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남북관을 다듬어왔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현실에 비춰보자면 박정희와 김대중 두 지도자의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면 박정희 체제의 가치를 이어오면서 나름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려던 보수 세력은 이제 박정희와 싸우던 김대중의 가치를 수용하지 않는 한 점차 주변화될 운명에 놓여 있다. 평화, 생산-복지의 선순환, 지방분권, 국가보다는 시민의 참여라는 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보수세력은 역사의 낙오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면 김대중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온 중도 진보세력이 역사의 최종 승자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이르다. 김대중의 평화·복지·시민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이어받았지만, 가치를 수용하는 것과 이를 현실에서 실현해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김대중 철학의 계승자이지만 이를 실천하는 현실의 마당에서 중도 진보세력은 다양한 어려움을 계속 겪어왔다.

먼저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하는 보수세력의 과제와 처지부터 살펴보자. 87년 이후 보수세력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박정희 체제와 근본적으로 결별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치장하고 변형하는 데 안주해왔다. 그나마 꼽을 수 있는 과감한 실험은 94년부터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세계화 개방이었다. 80년 무렵부터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기 시작한 글로벌 정치·경제 질서의 개방화 흐름 속에서 한국의 보수가 세계화 흐름에 탑승한 것은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보수는 김대중 철학 이해해야

문제는 세계화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지만 보수가 이를 실행하는 방식은 여전히 박정희 체제에 갇힌 채였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는 과거를 연상케 하는 국가 주도의 하향식 개방, 그리고 개방의 사회적 후폭풍을 외면한 반쪽짜리 개방이었다. 94년 세계화 드라이브를 시작하면서 김영삼 정부는 자본시장·외환시장의 급격한 개방을 주도하였지만, 개방이 가져올 변동성과 위험을 통제할 제도 정비에는 소홀하였다.

결국 97년 초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경고음이 요란한 가운데에도 금융 감독 체제의 정비는 이뤄지지 않았고 이는 마침내 국제통화기금(IMF)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 금융을 받는 사태로 이어졌다. IMF 관리 체제에서 수많은 조기 퇴직자들이 발생하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게 되면서 세계화 개방은 곧 양극화로 이어진다는 단순하고도 편향된 프레임이 우리 사회에 넓게 자리 잡게 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친 이후 권력에 복귀한 보수세력은 ‘맞춤형 복지, 생애 주기별 복지’를 들고 나왔지만 이러한 복지정책은 보수의 근본적인 사상의 전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다. 서유럽 복지국가가 “복지 없이는 시장경제가 유지될 수 없다”는 진보와 보수의 공통 현실 인식 위에서 확립되었다면, 한국 보수의 복지정책은 여전히 시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의 주요 사업 정도로만 이해되었다. 보수세력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 약자를 끌어안는 연대 의식, 시장경제와 정의라는 관념을 체화하지 못한 채 편의적으로 복지를 확장해왔을 뿐이다. 30년에 걸친 민주주의와 수십 년에 걸친 압축 성장 이후 시민들의 사고는 경쟁보다는 분배, 개인의 능력보다는 평등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지만, 보수세력은 현실의 변화 앞에서 손을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진보는 김대중 철학 정책화 능력 키워야

보수의 문제가 현실 이해의 부족과 철학의 빈곤이라면 진보의 문제는 가치를 정책으로 전환하는 능력의 문제이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진보 정부가 김대중 철학을 적극적으로 이어왔다는 것은 상식이다. 평화·복지·한미동맹의 전환, 시민 민주주의 등은 세 진보 정부가 지지를 끌어모으는 가장 핵심적 동력이었다. 문제는 정치적 가치가 현실 세계를 만날 때 겪게 되는 장벽을 넘어 어떻게 실질적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이다.

먼저 노무현 정부의 대미 관계 경험을 살펴보자. 노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에는 강렬한 반미 구호를 마다치 않았지만, 임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미국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었다. 임기 초부터 북핵 위기는 심화하고 있었고, 노 대통령은 따라서 미국의 협력이 절실하였다. 때마침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에 국군의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실용적 접근을 시험에 들게 하였다. 노 대통령은 비전투병 파병이라는 타협책을 내놓았지만 정작 여당과 대통령 지지 세력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였다.

노 대통령은 파병을 통해 북핵 위기관리에 필요한 미국의 협력을 끌어내기는 하였지만, 실용적 대미정책에 반대하던 본인의 지지 세력을 설득하는 데에 미치지 못하였다. 노 대통령의 실용노선과 지지 기반의 이념 성향은 계속 충돌하였지만, 갈등은 쉽사리 관리되지 못하였다.

문재인 정부도 철학과 정책 딜레마 여전

문재인 정부에 있어서도 철학과 정책 사이의 딜레마는 여전한 숙제이다. 한반도 평화에 있어서 문 대통령은 이 딜레마를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듯하다. 북·미 중재를 통해서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실마리를 찾고 있고 이러한 노력은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모두의 지지를 얻고 있다.

철학과 정책 사이의 딜레마는 경제정책에서 두드러진다.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성장도 이루고 약자들의 삶도 개선한다는 고상한 목표는 요즘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빠른 보폭이 500만 자영업자들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면서 자영업자들의 삶은 위태로워지고 있다. 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끌어올린다는 선의의 목표는 과포화 상태인 자영업 시장, 이들의 낮은 이윤과 장시간 노동,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다양한 구성과 이해관계라는 현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생전 김대중 대통령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이 정치의 요체임을 반복해 강조하였다. 그 점에서 김대중 체제는 아직 절반만 완성되어 있다. 과거의 성공 신화에 갇혀 현실의 변화를 안이하게 바라보는 낡은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후 시민들 사이에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가치들에 뒤처져 있다. 한편, 김대중 철학을 계승해온 진보는 가치를 현실화하는 현실 감각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는 한다. 서생과 상인의 변증법으로서의 김대중 체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장훈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본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