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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십 코드 도입하는 국민연금 … ‘집사’의 독립성 확보 못하면 정권 쌈짓돈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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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호 02면

SPECIAL REPORT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유령이. 원조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다. 1976년 펴낸 저서 『보이지 않는 혁명: 연금 사회주의는 어떻게 미국에서 일어났는가』에서 처음 등장했다. 드러커는 10여 년이 지나면 퇴직연금 등 기관투자가가 미국 상장주식의 70%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봤다. 그러면 연금은 주주로서 기업을 지배할 수 있고, 결국 연금의 주인인 노동자가 기업을 지배하는 연금 사회주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연금 가입자들은 수익률 제고를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의 밥줄을 끊는 구조조정이 연금의 주도로 이뤄졌다.

‘연금 사회주의’ 비판했던 박근혜 #대통령 되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소액주주운동 벌인 장하성·김상조 #상장사 시총의 7% 쥐락펴락 우려 #사외이사 추천 등은 나중에 검토 #올해는 배당 관련 주주활동 집중 #해외 연금은 민간 자회사 등 활용 #“기금운용 투명성 강화, 기준 세워야”

미국 땅에선 사망선고를 받은 연금 사회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부활했다. 첫 등장은 2004년 참여정부 시절이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연기금의 의결권을 허용하는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을 추진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연기금 사회주의로 가려 하느냐”며 강력 반발했다.

2007년 1월에는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이 유령을 소환했다. 그는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예외적인 경우 경영권에 직접 개입하겠다”고 말했다. 마침 국민연금이 SK텔레콤을 제치고 포스코의 최대주주(2.86%)가 됐다. 야당은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연금 사회주의를 하자는 거냐”고 비판했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유령은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실세인 곽승준 당시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은 2011년 4월 “대기업들의 거대 관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적극 북돋우겠다”고 말했다. 우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명박 정부 정책이 참여정부보다 더 좌파적”(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국민연금 “올해는 배당에 집중”=연금 사회주의가 다시 논란의 핵으로 떠오른 것은 국민연금이 이달 말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가 살림을 책임지는 집사(스튜어드)처럼 고객이 맡긴 돈을 충실하게 관리·운용하는 행동지침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역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 오바마 정부는 2010년 7월 강력한 금융규제법인 ‘도드-프랭크법’을 도입했다. 은행의 투자 행태를 규제하고 감독을 강화했다. 영국은 느슨한 자율규범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지키지 않는다고 처벌을 받지 않는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 영국식 자율대응 규범은 전 세계 20여 개국이 도입하며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4년 말 처음으로 언급됐다. 하지만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행사해 오던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먼저”라고 반발했다. 이런 논란을 딛고 2016년 12월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가 제정된 것은 8할이 ‘최순실 사태’ 덕분(?)이다. 국민연금이 정권에 휘둘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했다가 6000억원을 날렸다. 또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외부 입김으로부터 국민연금을 보호할 만한 방패막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달 말 국민연금이 도입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지난 4월 공개된 고려대 산학연구단의 용역보고서보다는 훨씬 수위가 낮아졌다. 경영 참여로 분류되는 사외이사·감사 추천, 의결권 위임장 대결 등은 나중에 검토할 사안으로 분류했다. 민간 위탁운용사를 활용한 주주 활동, 중점 관리사안 확대, 중점 관리 기업 공개 등도 단계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에 정부가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일단 올해는 배당 관련 주주활동 개선에 집중한다.

◆무용론 vs 연금 사회주의=스튜어드십 코드 초안에 대해서는 찬반 양 진영이 모두 불만이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등은 지난 19일 성명서를 통해 “국민연금이 경영권 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를 스튜어드십 코드에 포함하지 않으면 향후 제도의 무용론이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간 국민연금이 ‘가입자의 집사’가 아니라 ‘정권의 집사’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20일 여의도연구원(자유한국당 싱크팅크) 세미나에서 “스튜어드십 코드가 자율규범인 ‘연성법’인데도 한국에선 ‘강행 법규’처럼 운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문제는 국민연금의 독립성 확보인데도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보장할 지배구조 변경 등 제도적 개선책은 전혀 없다”며 “정치·경제 권력의 영향을 받아 독립성 논란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특히 현 정부를 구성하는 인사들의 면모에 주목한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2000년대 초반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소액주주운동을 벌였다. 김 위원장은 2004년 SK 주주총회에 참석해 경영진의 등기이사 퇴진을 요구했다. 장 실장은 첫 토종 행동주의 펀드라 할 수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일명 장하성 펀드)를 2006년 만들었다.

당시 적은 지분으로도 파란을 일으켰던 이들이 전체 상장사 시가총액의 7%를 보유한 국민연금을 앞세워 주주권을 행사하면 그야말로 연금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결국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해외에서는 기금 운용의 독립성 확보에 힘을 기울인다. 캐나다는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에 연기금 운용을 독립적으로 맡기고 이들이 의결권을 행사한다. 일본은 보건복지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국민연금과 비슷하게 후생노동성이 공적연금(GPIF)을 통제한다. 다만 주주권·의결권 행사를 외부 민간운용사에 100% 위탁한다. 네덜란드공적연금(ABP)은 민간 자회사인 자산운용공사(APG)를 설립해 기금 운용을 맡기고 있다. 스웨덴 국민연금(AP)은 6개 기금으로 나눠 서로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정부는 결과만 사후에 보고받는다.

이와는 달리 청와대가 기금운용본부장 인선에 개입하는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더라도 국민연금이 정권의 쌈짓돈이 될 수 있다.

정우용 상장회사협의회 전무는 “기업이 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며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먼저 강화하고 기준이나 운용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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