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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마타하리’ 20대 러시아 스파이에 워싱턴 뒤집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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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에서 러시아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18일 구속된 부티나(오른쪽)가 음식점에서 러시아 요원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에서 러시아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18일 구속된 부티나(오른쪽)가 음식점에서 러시아 요원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대 러시아 여성이 전설적 간첩 마타하리 같은 수법으로 전미총기협회(NRA)를 통해 공화당 등 보수 정치권에 침투한 사건이 불거지면서 미국 수도 워싱턴이 발칵 뒤집혔다. 이 여성은 2016년 대선 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공화당 대선 캠프 비밀 채널을 만들려고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푸틴 편들기’ 논란에 이어 연거푸 악재가 터진 셈이다.

총기협회 통해 보수 정치권 침투 #공화당 인사와 동거 등 미인계 이용 #대선 땐 미·러 비밀 채널 구축 시도 #트럼프, 푸틴 편들기 이어 또 악재

논란의 스파이는 현재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 유학생인 마리아 부티나(29)다. 그녀는 지난 15일 외국 정부의 불법 요원으로 활동한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했다. 워싱턴 연방법원은 18일 재판에서 “도주 위험이 크고 그녀에게 포섭된 미국 정계 인사들에 대한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는 검사 측 주장을 받아들여 보석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 연방수사국(FBI)가 공개한 공소장과 진술서에 따르면 이 여성의 배후 인물로 푸틴 대통령의 측근 고위 관료이자 억만장자인 알렉산더 토르신 러시아 중앙은행 부총재였다. 미 대선 국면이 시작된 2015년 초부터 지난해까지 미 재무부의 제재 대상인 토르신(2015년 당시 러시아 연방의원)의 지시를 받아 그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일했다.

부티나는 2013년 러시아에서 총기 옹호 단체 활동을 하며 친분을 맺은 NRA와 공화당 정치 후원 단체인 보수정치행동위원회(CPAC)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성관계 등 미인계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2016년 8월 아예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 유학생으로 입국한 후 자신의 활동을 도와준 미국 정치권 인사와 동거를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부티나와 동거한 인물이 NRA 회원이자 공화당 정치컨설턴트인 폴 에릭슨(56)이라고 보도했다.

에릭슨은 부티나를 도와 2016년 당시 트럼프 캠프에 있던 릭 디어본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과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에게 “NRA 총회 때 후보와 푸틴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하자”는 ‘크렘린 커넥션’이란 제목의 e메일을 보냈던 장본인이다. 같은 해 5월 켄터키주 루이빌에 열린 NRA총회에서 트럼프와 푸틴 회동은 불발됐지만 부티나는 토르신과 함께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

부티나가 또 다른 미국 정계 인사에겐 특수 이익단체에 자리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성관계를 제공했다는 점도 혐의에 포함됐다. 신원이 공개되지않은 이 사람은 미 정치권 유력인사들과 러시아 정부 인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2016년, 2017년 연속으로 정계인사들이 총출동하는 국가조찬 기도회에 러시아 대표단의 참석도 주선했다.

부티나는 이 인사에게 “토르신이 당신에게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는 감사 인사도 전달했다. FBI는 부티나가 수년간 토르신과 주고 받은 e메일·트윗 등이 담긴 노트북을 압수해 상세한 활동 내역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부티나는 지난해 1월 20일 비밀 채널을 만들기 위해 공들였던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날 의사당 옆에서 사진을 찍어 토르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토르신이 “당신은 정말 겁이 없는 여자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자 “좋은 스승 덕분”이라고 주고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러시아의 2016년 대선 개입과 연관된 부티나 사건을 정치쟁점화하고 나섰다. 애덤 쉬프 민주당 하원 정보위원회 간사는 “러시아의 비밀 요원으로 공화당과 비밀 막후 채널을 만들어온 혐의로 체포된 부티나와 관련자에 대한 증인 소환을 공화당이 거부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러시아 외무부 마리야 자하로바 대변인은 18일 “부티나 사건은 (미·러) 정상회담의 긍정적 효과를 최소하려는 목적을 갖고 벌어진 일”이라며 “우려를 갖고 관련 보도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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