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원 “평양에 북한판 증권거래소 설립 준비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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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정지원 이사장

정지원 이사장

“북한 내 자본시장 설립 추진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

북한 사금융 시장 아직 원시적 수준 #조선중앙은행 통해서만 자금 조달 #마지막 남은 자본시장 불모지 개척 #정 이사장 “실무 연구반 꾸려 검토”

정지원(56)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가칭 ‘평양거래소’ 구상을 밝혔다. 한국거래소와 같은 북한판 증권거래소가 설립될 수 있도록 지원할 준비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북한은 동아시아 지역에 남은 마지막 자본시장 불모지다. 북한 기업은 국가 소유다. 여러 사람이 투자해 기업의 권리를 나눠 가지는 주식회사 개념이 당연히 없다.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인 증권거래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IBK경제연구소와 한국금융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기업이 자금을 공급받는 경로는 극히 단순하다. 조선중앙은행에 개설된 계좌(1사당 1계좌)를 통해 자금을 받아 자재, 설비 등을 사들인다. 사금융 시장은 전당포나 고리대금업 형태의 원시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본의 공적 소유를 강조하는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을 살펴봐도 북한처럼 폐쇄적인 사례는 찾기 힘들다. 중국은 1990년 일찌감치 자본시장을 개방했고 그해 상하이증권거래소, 이듬해 선전거래소를 잇따라 설립했다. 러시아도 1991년 증권거래소를 열었고, 베트남 역시 2000년 호치민거래소를 설립하면서 주식시장 문호를 개방했다.

2016년에는 미얀마도 외국인 주식 투자가 가능한 양곤증권거래소의 문을 열었다. 미얀마 증시 개장 이후 북한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증권거래소가 없는 국가로 남아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정 이사장의 평양거래소 설립 지원 언급은 최근의 남북 관계 개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최근 남북 관계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고, 경제협력 재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자본시장 차원에서의 협력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이어 “북한 경제 개발을 위한 대규모 자금 조달과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위해선 궁극적으로 북한에서의 자본시장 개설이 필요하다”며 “실무 연구반을 조직하고 제반 여건을 검토해 여건이 성숙했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평양거래소의 의미는 작지 않다. 실제 설립으로 이어진다면 북한 개혁·개방 및 자본주의 이행의 상징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멀리 본다면 남북 경제 통합의 싹이 될 수도 있다. 평양거래소가 설립돼 순조롭게 발전하고, 나아가 남과 북의 거래소 통합으로 자본시장 통합이 이뤄지면 남북 경제는 사실상 통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아직은 정 이사장이 밝힌 ‘여건이 성숙했을 때’, 즉 평양거래소 설립 가능 시점이 언제일지도 예단하기 힘들다.

북한 기업들이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궁극적으로 외국인도 투자가 가능할 정도의 시장 개방을 이뤄내기까지는 길고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북한 경제 지원과 개발에 있어 첫 단추 역할을 할 북한 비핵화 협상도 이제 첫걸음을 내디딘 상태에 불과하다.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자본시장 개방은 국가체제 개혁과 맞물려 있다.

정 이사장도 평양거래소 관련 언급이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상황, 즉 북한 시장 개방을 대비하는 연구 단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남북 관계와 관련해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해야 이뤄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평양거래소 설립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는 의지는 감추지 않았다. 해외 거래소 설립을 도와준 전례와 이 과정에서 쌓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는 그동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우즈베키스탄 등 신흥 자본시장 개방 국가에 증권거래소 설립과 관련해 ▶정보기술(IT) 시스템 구축 ▶법규·제도 개혁 자문 ▶지분 투자, 합작 회사 설립 등을 지원해왔다. 정 이사장은 “북한 거래소 설립을 지원하는 데 있어 다른 나라들의 거래소 설립을 지원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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