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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여름<43>|삼청교육 폭행치사죄에도 형 면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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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때리면 때리는 맞겠다.』법치국가에서 이런 율법이나 규칙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정변 후 새 정권을 뿌리내려야 할 필요성 등을 감안하더라도 이 같은 수칙은 그 정당성을 설명키 어려운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수칙은 때리는 사람, 맞는 사람 모두에게 의해 충실히 지켜졌고 그로 인해 삼청교육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리는 사람은 새사람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맞는 사람이 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없는 갖가지 방법이 다 동원됐습니다. 비록 다수가 못된 인간으로 낙인찍혀 사회의 따돌림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수련생들은 젊은 조교들의 가혹성 앞에 몸부림치며 당해야 했습니다. 주먹으로 치고 구둣발로 짓밟는 일은 약과였습니다. 곡괭이자루·각목·M-16 개머리판·쇠꼬챙이 등 갖가지 도구가 사용됐습니다.
『차렷 자세 중 「눈알을 굴렸다」고, 모기가 달려들어 몸을 움직였다고, 허리띠 버클리 비뚤어졌다고, 모든 게 때리는 이유가 됐습니다. 더군다나 금지된 행동, 즉 담배를 주워 피우거나 탈출하다 붙잡히거나 하면 정말 끔찍한 체벌이 가해졌습니다. 철사로 몸을 꽁꽁 묶어 연병장을 기게 하고 영하 30도의 날씨에 옷을 홀랑 벗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다른 수련생들이 지켜보게 하는 방식으로 교육적 효과를 노렸지요.』
삼청교육을 직접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발이다.
『과거의 잘잘못을 떠나, 그리고 교육대 내에서의 잘못이 어떤 것이었더라도 이것은 너무했습니다. 그래도 인간인데…. 삼청교육대의 잔학성은 결국 인권의 차원에서 지금이라도 심판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85년 8월부터 12월 사이 조교들의 폭행으로 숨진 사람은 8명. 이중 2명은 삼청교육대의 4주 교육을 마치고 근로봉사대에 편입돼 있다가 죽었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순태(당시33세, 8월 6일 8사단 김규식 중사 등 8명이) ▲장영권(36세, 8월 8일 수기사 이경상 중사 등 2명이) ▲김영철(42세, 8월 12일 35사단 강찬도 하사 등 8명이) ▲윤상섭(41세, 8월 14일 20사단 김승욱 중사가) ▲임근실(3l세, 12월 15일 28사단 김남식 하사 등 3명의 특수폭행으로) ▲강정수(31세, 12월 22일 동경사 박모 대위가) ▲박우오(30세, 9월 18일 특전사 김계영 중사 등 2명이) ▲이종수(36세, 8월 24일)
숨진 이종수씨의 경우는 구타로 숨진 사실 외에는 가해자에 대한 기록조차 군 당국에 보관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숨져간 사람들의 가족에게는 ▲근무 중 사망 4백만원 ▲변사 3백만원 ▲자살 1백만원이라는 계엄사의 보상지침에 따라 보상금이 나갔고 20만원의 장례비 보조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폭행치사 또는 특수폭행치사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이들 현역 군인들은 대부분 기소유예처분을 받았거나 공소기각(동경사 박모 대위), 자대 징계 (특전사 김모 중사 등) 라는 경미한 처분이 내려졌다.
김영철씨를 때려 숨지게 한 35사단 강찬도 하사 등 8명만이 징역 l년 6월을 선고받았으나 그들도 형 집행이 면제됐다.
이유와 경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게 했는데도 처벌내용이 이러했으니 당시의 정황은 대충 알만한 일이었다. 안 죽을 정도라면 얼마든지 때리거나 가혹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당시 교육대의 분위기였다. 삼청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가해자에 대한 이런 경미한 처벌이 젊은 조교들의 폭행심리를 조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육군의 한 장성은 『원체 난폭한 수련생들이 규율을 어기고 못 되게 구니 교육을 시키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상사』라며 『일반 사범들도 짧은 시일 내에 훈련을 시키다 보면 별의별 사고가 다 생기는데 하물며 전과자 등이 대다수인 이들 집단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83년 한해동안만도 현역 군인끼리의 폭행으로 33명이 숨졌고 군 지휘부의 엄격한 감시와 관계자들의 처벌로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87년도에도 3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군내와 일반사회의 이 같은 시각차는 삼청교육대를 중점 추궁한 지난 5일 국방부의 국정감사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답변에 나선 국방부 동원예비국장이 「삼청교육대 실태보고」라는 유인물을 통해 『삼청교육은 사회불량배를 소탕하여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하자 야당의원들이 들고일어났다.
『그게 정의사회 구현이냐』는 야당의원들의 호통에 오자복 장관은 『동원예비국장의 보고는 군이 잘 했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증언한 것 일뿐』이라고 해명, 의원들을 일단 진정시킨 뒤 『타살자는 보호감호 기간 중 집단난동을 일으킨 자들로 흥분한 상태에서 총기 탈취기도 등 위험한 상황이 예견돼 소수경비병력으로서는 사태진압을 위해 무기사용 등이 불가피했으며 위법성 조각사유로 관계자들을 문책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이종구 육군참모 총장은 6일의 국정감사에서 폭행군인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경미했다는 의원들의 지적에 『미흡한 것은 사실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벌은 당시 적법절차에 따라 이뤄졌고 공소시효가 완료됐을 뿐 아니라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이제 와서 제재를 다시 가할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구타로 인한 사망자 외에도 심한 교육훈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이 2명이며, 집단난동을 선동하다가 사살된 사람이 3명이었다. 이밖에 수류탄 폭발로 2명이 숨지는 등 사고사는 15명인데 순화교육(26명)·근로봉사(12명)·보호감호(12명) 등 숨진 50명중 나머지 35명의 병사자도 가혹행위와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게 삼청교육 체험자들의 주장이다.
군 당국은 질병 사망자의 사망원인을 심부전증 7명, 패혈증 5명, 복막염 4명, 폐렴 4명, 기도페쇄 3명, 뇌출혈 2명, 결핵2명, 기타 8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특히 복막염· 뇌출혈 등으로 인한 사망자에 대해서는 의혹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숨진 사람들의 소속부대를 보면 특전사 6명, 수기사 4명, 6사단 4명, 26사단 4명, 38사단 4명, 1군단 3명, 1사단 3명, 28사단 3명, 9사단 등 14개 부대에서 19명 등으로 나타나 사망원인이 사고사이건 병사이건 훈련의 강도를 대충 짐작케 하고 있다.
수련생들의 인성·자질을 이들의 사망·입원 등과 연관시키는 군 당국은 최근 자료에서 삼청교육대 입소생들의 순화과정 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최초 입소 후는 공포심으로 반항적이 되며 따라서 기율을 잡기 위해 엄한 체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②1주 경과 후에는 체념상태가 되고 ③2주 경과 후에는 반성기미가 나타나며 ④후반기에는 순화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직접 체험자들도 입소 처음 며칠 간 가장 가혹행위가 심했으며 2주 째는 자치제도를 도입하고 후반기에는 군사훈련보다는 근로작업에 투입하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입소 때보다 폭력·가혹행위에 면역된 것이지 새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갔다고 밝히는 삼청교육대 측의 주장은 엉터리라고 반박한다.
군 당국은 설문조사 결과 ▲순화교육의 성과 및 필요성을 인정한 입소자가 94% ▲퇴소 후 새사람이 되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겠다고 다짐하는 입소자가 97%라며 삼청교육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그 후 이들이 지역사회에 끼친 해독이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입증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더 포악해지고 삼청교육대상자라는 낙인 때문에 오갈 데 없게 됨으로써 범죄 집단에 더 적극적으로 들어가게 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쇼크요법의 효과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삼청교육 이수자가 다시 삼청교육대나 근로봉사대에 붙들려온 사례가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을 삼청교육대에 집어넣은 관계자들에게 보복하려다 붙들려 재 입소하기도 했지만 진짜 완전한 불량배가 되어 그렇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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