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장자는 도내인과 깊은 관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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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기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후지노키(등노목) 고분의 석관 뚜껑이 열리던 8일 일본역사의 고장이며 천황의 뿌리를 이어왔다는 나라(나량) 지방은 흥분과 감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것은 지난 20여일 간「히로히토」(유인) 일황의 중병으로 가장 우울에 잠겨있던 일본인들을 찬란한 고대사의 대로망으로 이끌어 내는 즐거운 뉴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고분에서 출토된 마패 등 여러 가지 부장품들은 그것이 중국 또는 멀리 사라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억세게 주장해 왔던 일부 고고학자들을 침묵시키거나 아니면 한반도 전래론으로 결국 전향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뚜껑이 열린 석관의 내부는 고대 일본문화가 신라·고구려·백제 등 삼국으로부터 전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첫째, 금동제의 신발은 경주의 식리총고분(5세기 후반) 및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며 이 신발 등에 붙어 있는 보요(걸어다닐 때 소리가 나도록 한 장식품)는 중국·일본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삼국시대의 독특한 장식이다.
둘째, 석관 내부에 있는 큰칼 손잡이에 있는 물고기 모양의 장식도 한반도가 그 원류다.
셋째, 피장자의 발 밑 부분에 놓여 있는 금 장식품에는 귀갑문이 들어가 있으며 이 같은 문자는 백제 무령왕릉 내부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나량 국립문화재연구소 부속 아스카(비조) 자료관의 「이누쿠마」(저능겸승) 학예실장은『보요가 붙은 장식품은 고대 한국에 있었던 것이며 석관에 묻혀 있었던 사람도 한국과 관계가 깊은 인물로 생각된다.
금동제 신발은 신분이 매우 높고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 된 도구』라고 말했으며「다데」(이달종태·화원대·고고학) 교수는 『금동제 신발은·신라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것으로 매우 훌륭하다. 보요가 달린 다른 금동제품에 귀갑문이 들어있는 것은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옛 한국의 대일 문화전래에 매우 신중한 입장을 지켜왔던「아리미쓰」교수(유광교일·경도대 명예교수·고고학)도 『한반도 고부의 유물을 생각게 한다. 석관 내부에 한국 것과 똑같은 것이 여기 저기에 있었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석관에 묻혔던 인물을 밝혀내기까지에는 더 많은 과학적·연사적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인물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내인과 깊은 관련어 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력한 피장자로는「소가」(소아) 「모노노베」(물부) 「가사와데」(선)등 8∼10명.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 교수(명치대)는 『석관의 주인공은 백제계 도래인의 2∼3세인 것으
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3년 전 후지노키 고분에서 출토된 마패와 이번 석관에서 나온 금동제 신발에서 발견된 귀갑문은 6세기 중엽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9일 나량 현지에서 석관 내부를 직접 조사한 이씨는 『후지노키 고분은 삼국시대의 도래인들이 전해준 문화가 일본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석관의 유물형태로 보아 삼국 중 특히 백제문화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이 특징이다』고 밝혔다.
한 일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만한 다카마쓰(고송) 총은 지난 72년에 일본천황의 가계에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야기가 무성하게 나도는 가운데 조사가 중단되었다. 일본에서 무수히 발굴되었던 고분은 한국의 옛 삼국시대의 문화권에서 논의되다가 흐지부지 되거나 아예 묻혔다.
이번 후지노키 고분은 지난 3년 동안 매우 신중한 발굴과 조사작업으로 석관의 개봉에 이르렀으며 한국과의 역사를 더 이상 애매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첫 번째 시도로 기대된다. 그러나 그 같은 시도는 연구작업에 한국 측 고고학자들도 적극 참여하는 길이 열려야만 양국간 역사적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동경=최철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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