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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생각나는 옛 시절 아스라한 풍경, 그리운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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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 보면(28)

뉴스에서 장마라더니 비가 또 내린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중앙포토]

뉴스에서 장마라더니 비가 또 내린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중앙포토]

뉴스에서 장마라더니 비가 또 내린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동촌 비행장 근처에 살던 내 어린 날의 기억에선 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비행기가 지나갔고 집 앞엔 큰 강물이 흘렀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랑 자주 강가에 가서 모래 놀이를 했다.

어느 날엔 우리 방이 물에 잠기기도 했는데 우리는 무엇인가로 물장난을 하며 엄마 아빠가 물 퍼내는 광경을 즐겁게 지켜보며 깔깔 웃기도 했다. 어린 우리를 작은 다락방으로 올려보낸 부모님은 수건을 뒤집어쓴 머리를 들어 한 번씩 우리에게 씩~ 웃음을 주시던 그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아마 참 가난했다던가 그해에 많은 비가 내렸다던가 아니면 그 시절엔 강둑이 잘 무너져서 그것이 터진 것인지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일까, 꿈이었을까’ 하고 폭우 태풍 뉴스에도 찾아보았던 어린 날의 비는 즐거운 풍경으로 떠올라 나이 들어서는 가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팔달교 위에서 떠내려오는 돼지를 보기도

중학생이던 사춘기 시절엔 팔달교 근처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외곽으로 이사한 거였는데 우리는 그때까지 그런 형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뚝만 넘으면 금호강이어서 학교 다녀와서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수건 나부랭이를 들고 강으로 빨래하러 가곤 했다. 그곳 사람들은 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에 강모래를 팔아 생활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이 있는 집은 요즘의 화물차 역할을 하며 그럭저럭 살았던 것 같다.

금호강 하중도 전경. 뚝만 넘으면 금호강이어서 학교 다녀와서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수건 나부랭이를 들고 강으로 빨래하러 가곤 했다. 백경서 기자

금호강 하중도 전경. 뚝만 넘으면 금호강이어서 학교 다녀와서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수건 나부랭이를 들고 강으로 빨래하러 가곤 했다. 백경서 기자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온 동네 사람들이 팔달교 다리 위에 올라가 물 구경을 했다. 어느 땐 다리가 둥둥 떠내려가는 느낌이 들 만큼 물이 많이 흘러 머리가 뱅뱅 돌기도 했다. 살아있는 돼지가 떠내려올 때면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서울에서 살 적엔 뚝섬역 근처에서 살았다.
거기서도 앞쪽은 한강이. 뒤쪽은 중랑천이 있어 물과 가까웠다. 일을 마치고 시간이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강변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어느 해에도 비가 엄청 많이 내렸다. 중랑천이 범람했다던가 둑이 무너지려고 조짐을 보였다던가 아무튼 모두 한양대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와 술렁거린 때도 있었다. 우리 공장은 지하실이라 당연히 물이 들어와서 양수기를 돌리고 중요한 기계는 위층으로 이사하다시피 했다. 그때 남양주시에서 출근하는 성실한 여직원은 걸어서 오후 4시쯤 공장에 출근했는데, 아직도 서로 연락하며 그 이야기를 하며 지낸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남편은 아침 일찍 다리 쪽으로 배달을 나가다가 그 광경을 지켜봤다. 금방 나간 사람이 급하게 들어와 난리가 났다며 공장에 있던 스티로폼을 모두 싣고 달려가서 강에 투척했는데 훗날 죽기 전까지 그 이야기를 했다. (방송에 잠시 나왔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 같다.

강가 그림 같은 집은 흥칫뽕! 직접 살아보라지!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엔 비만 오면 넘쳐 마을을 덮었다는 낙동강 물이 요즘엔 어지간한 비에도 넘치지 않고 유유하게 흐른다. [사진 송미옥]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엔 비만 오면 넘쳐 마을을 덮었다는 낙동강 물이 요즘엔 어지간한 비에도 넘치지 않고 유유하게 흐른다. [사진 송미옥]

지금은 낙동강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남이 보기엔 엄청 낭만적인 삶을 사는 듯 보인다. 서울 살 적 가끔 양평으로 여행을 가면 호수 같은 멋진 물 섶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사는 사람들을 보며 ‘전생에 무슨 복이 많아 저리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까’ 하며 부러워했다. 전혀 부러워할 게 아니라는 것을 살아보니 알겠다.

강바람은 얼마나 센지, 습도는 또 얼마나 높은지, 세상의 모든 곤충은 왜 물 가까이 다 모여드는지, 해만 지면 창가에 붙어서 괴물 영화를 찍는다. 살아보지 않을 땐 그 풍경이 부러웠지만, 단점을 알고 나면 멋진 풍경 값을 하느라 단점은 더 많다. 바다 근처의 멋진 집에 사는 사람도 같다. 바람, 습도, 벌레는 남이 멋있게 봐주는 풍경에 지불하는 세금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서 사느냐보다 누구랑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가삼간에 살며 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어도 좋은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물이 불어난 강을 따라 청둥오리 떼가 둥둥 떠내려가듯 지나간다. 아름답다. 앞장선 어미는 ‘이 정도쯤이야~’ 하듯이 조용한 포즈로 물살을 따라가는데 뒤따르는 새끼들은 촐랑촐랑 퍼덕거리며 난리들이다. 물속에서 다리가 아프도록 중심을 잡고 있을 어미가 우리 세대가 사는 모습 같아 애잔하다. 이글을 함께 하는 분들에게 비 피해가 없기를 기도하면서.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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