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박인수를 기억하는지. 1955년 한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바로 그 '한국판 카사노바'다. 댄스홀에서 만난 여성 70여 명과 결혼을 약속하는 등 사기 행각을 벌인 끝에 공무원 사칭과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가 교수 부부의 맞바람을 그린 정비석의 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을 놓고 "중공군 50만 명에 필적할 만큼 사회적으로 위험한 적"이라고 공개 비판해 사회적 논쟁이 한창 진행될 때라 더 그랬을까. 그의 재판엔 방청객 수천 명이 몰릴 정도로 뜨거운 관심이 쏠렸다.

'한국판 카사노바'로 1955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박인수. 법정엔 방청객 수천 명이 몰렸다. [중앙포토]

'한국판 카사노바'로 1955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박인수. 법정엔 방청객 수천 명이 몰렸다. [중앙포토]

 이 재판은 여러모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대표적인 게 숫처녀 논쟁이다. "숫처녀는 70명 중 1명뿐이었다"는 박인수의 법정 발언이 발단이었다. 어느새 죄지은 자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쑥 들어가고 거꾸로 피해자인 여성의 정조관념을 꾸짖는 목소리만 높아졌다. 아예 한국 여성 전체를 싸잡아 '무너진 정조관념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거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성이 많아졌다'는 개탄 조의 비판기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급기야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는 법이 보호하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판결까지 등장한다. 당시 1심을 맡은 권순영 판사는 공무원 사칭만 유죄로 판결하고 혼인빙자간음엔 무죄를 선고했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한다"는 이유로. '법 앞의 평등'도 혼전순결을 거스른 여자들에겐 적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비석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자유부인'. 책 뿐 아니라 영화도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중앙포토]

정비석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자유부인'. 책 뿐 아니라 영화도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중앙포토]

 60년도 더 된 옛일을 끄집어낸 건 세상 달라진 줄 모르고 여전히 여성차별적이고 여성비하적인 시각을 공공연하게 내비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다. '좋은 아빠'를 내건 모 단체가 만들어 어느 신문이 실은 '좋은 남편 체크리스트'를 우연히 봤더니 가관이었다. 아내 혼자 장 보고 남편은 쉬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아내가 시장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즉시 달려가 물건을 받는다'는 항목은 애교 수준이다. 좋은 남편을 인증하는 고작 15개 항목 중엔 심지어 '아내를 때리지 않는다'가 포함돼 있었다. 아내를 때리지만 않아도 좋은 남편이라니, 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최근 잇따른 군내 성폭력 사건으로 가해자 엄벌의지를 천명해도 부족할 송영무 국방부 장관 역시 굳이 성폭력 관련 간담회에서 "여자 일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느니 "여성들은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내뱉어 분노를 샀다.
 다시 돌아가서, 그 시절 박인수조차 2심에서는 유죄가 선고됐다. 백번 양보해 성(性) 관련 문제가 벌어지면 무조건 여자 탓을 하는 게 그때 그 시절엔 맞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모르면 차라리 입 다무는 게 낫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