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도 올림픽 의의는 있다-스탠드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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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올림픽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두 한국선수의 이름을 마음속에 써본다.
김재엽과 변정일.
한 선수는 세계유도의 강적들을 하루 나절에 차례로 물리치고 조국에 두 번째 금을 안겨주었던 영광의 주인공.
바로 4년전 LA올림픽 결승에서 라이벌 일본선수가 안겨준 패배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던 김선수는 그 동안 와신상담,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수없이 매트에 몸을 내던져 왔고 이제 당당히 자랑스런 금메달리스트의 대열에 자신을 올려놓았다.
젊음을 걸었던 유도인생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다 즐거운 추억들이 되었고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지도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땀이 가져다준 결실은 이제 분명 그의 손안에 있고 그는 환한 얼굴로 양지의 한 가운데 서있다.
지금 내 기억의 필름에는 또 다른 선수의 모습이 오버랩 되고 있다.
몇 분전까지만 해도 파이팅을 외치는 관중들의 열띤 함성 속에서 온힘을 다해 경기를 했던 바로 그 링 위에 주저앉아 비처럼 쏟아지는 땀 줄기를 닦을 생각도 잊은 채 무언의 농성을 벌이던 그 모습.
한 뉴질랜드인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으로 수년간 흘려온 땀이 별다른 의미 없이 증발해버린 순간 그가 씹었을 좌절과 분노를 나는 TV화면에 클로스업 된 그의 얼굴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성난 코치와 임원들이 심판의 멱살을 잡았었고 링 위에는 철제의자가 날아드는 등 소란이 있었지만 링 위에 주저앉아있던 그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흔히 대개의 복서들이 그러하듯 그도「헝그리 복서 일 것이고 양지를 향한 일념으로 샌드백을 두들겨왔을 것이다.
그 심판 덕분에 (?) 메달에의 꿈은 사라져버렸고 소동의 주인공중 한사람이 되어「서울올림픽에 흠을 냈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내가 변선수 얘기를 꺼내는 것은 복싱경기장의 소란행위를 두둔하려는 뜻이 아니다.
경기진행을 방해한 폭력행위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 역시 운동선수 출신으로서 그의 패배와 좌절이라는 렌즈를 통해 스포츠경기가 가지고 있는 화려함과 처절함을 조명해보고 싶은 것이다.
올림픽에선 수만의 선수들이 치고 던지고 뛰고 달린다. 수백의 승리 뒤켠에는 수천의 패배가 있다. 은메달을 따고도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그 옆엔 동메달을 자랑스럽게 치켜든 환한 미소가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양지를 찾는다. 그들의 노력으로, 그들의 욕심으로 세계신기록의 벽은 또다시 무너지고 극적인 역전승이 벌어지며 눈과 귀의 장애를 무릅쓰고 물살을 가르는 투혼이 가능하다.
시종 불만이 잔뜩 어린 표정으로 웃음을 보이지 않던 소련의「슈슈노바」가 도마에서 만점연기로「실리바스」를 따돌린 것이 확실해지자 비로소 웃지 않았던가.
이제 서울올림픽은 중반전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정들은 많다. 「레체바」를 꺾었던 무명의 신인「칠로바」의 앳된 미소, 올림픽 사상 최초로 여자수영 6관 왕이 된「오토」의 환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가 된 후 성조기를 들고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던「플로런스·그리피스·조이너」, 그리고 하루에 6차례의 격돌을 승리로 이끌고 주최국 한국에 두 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유도선수 김재엽이 한복을 멋있게 차려입었던 모습 등.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만큼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패배를 기억한다.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자신 있던 링에서 실수로 떨어진「리닝」, LA한을 푸는데 실패한「메리·데커」, 세계랭킹 3백85위인 한국의 김일순에게 일격을 당한 세계6위의「헬레나·수코바」, 그의 패배가 전 미국인의 패배와 고뇌로 받아들여졌던「칼·루이스」, 그리고 성화 최종주자와 아시안게임 스타라는 영광이 높디높은 세계의 벽 앞에서 퇴색되어버린 한국의 임춘애.
이들의 승리와 패배에 따라 세계인들의 마음속엔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었고 서울올림픽은 캘린더의 한 장 한 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4일. 아직도 우리 앞에는「비안카·파노바」의 리듬체조가 남아있고 한국과 중국의 핑퐁마술사들이 펼칠 한판 승부가 있으며「아메드·살레」가 달릴 마라톤이 기다리고 있다.
선수들은 기록의 지평선을 더욱 넓힐 것이고 스포츠가 빚어내는 인간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일찍이 통과 서를 한 자리에 모았던 서울올림픽은 이제 신기록과 명승부의 무대로 그 빛을 더하고 있다.
완벽하고 효율적인 경기시설, 선수들의 혼을 일깨워주는 관중들의 열띤 성원,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기록을 만들어 내고 기억할 만한 승부를 그려내는 것.
이제 이 글을 마감하면서『나는 음지 한 가운데 쪼그려 앉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젊은 선수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새긴다.
그들에게『올림픽은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말은 어쩌면 부처님 말씀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뚝이처럼 쓰러지기를 거부했던 수많은 선수들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다시 한번 새기고 싶다.
『올림픽은 패배하는데도 똑같은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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