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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천재 박정민 "저란 놈은 그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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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산'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박정민.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변산'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박정민.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조‧단역 주로 하면서 아웃사이더였던 제가 인사이더, 좀 더 영화 안쪽으로 들어온 거잖아요. 졸지에 주인공은 맡았지만 박정민이란 사람은 크게 변한 게 없어요. 찍으면서 중압감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이준익 감독님과 동료배우들 덕에 버텼습니다. 영화 현장이 제일 재밌다는 걸 이 영화로 새삼 느꼈어요.”

 4일 개봉한 랩 음악영화 ‘변산’(감독 이준익)으로 만난 박정민(31)의 말이다. 독립영화 ‘파수꾼’(감독 윤성현)은 그가 장편영화 데뷔 7년 만에 만난 첫 원톱 주연작이다. 래퍼로서 실패를 거듭하다 고향 변산에 돌아간 서른한 살 학수의 성장을 담았다. 2년 전 영화 ‘동주’로 그를 대중 앞에 발굴한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선 10분의 1도 못 보여준 박정민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써먹으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영화 '변산' 주연배우 박정민 인터뷰 #'동주' 이어 이준익 감독과 2번째 작품 #첫 원톱 주연…중압감에 시행착오도

지난 주말 극장가에선 히어로 액션물 ‘앤트맨과 와스프’ ‘마녀’에 밀려 흥행 3위에 그쳤지만 박정민에 대한 관객 반응은 호평 일색이다. 이는 그가 학수의 속내를 담아 직접 작곡하고 부른 극중 수준급의 랩만 들어봐도 이해가 간다. 1년여에 걸친 노력의 결과다. 올해 초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성현)에서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피아노 천재 진태 역을 자폐 성향부터 피아노 실력까지 실제에 가깝게 소화해낸 데 이어서다.

#연습 괴물, 아니 노력의 천재

 “닮아 있지 아니 닮고 싶지도 않던 존재가 부재가/ 되며 남긴 말이 내 무제 인생의 부제 되네”. 박정민이 쓴 극중 랩 ‘노을’의 가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낙향한 무명 래퍼의 씁쓸함, 원망했던 건달 아버지(장항선 분)에 대한 뒤늦은 연민 등을 랩 플로우에 나지막이 녹여냈다. ‘변산’ 랩 프로듀싱을 맡은 래퍼 얀키는 그를 두고 “캐치가 빠르고 감정을 담을 줄 아는 데다 연습량까지 더해지니 정말 괴물 같다. 래퍼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섰다”고 인정했다.

 이준익 감독이 애초 랩 음악영화를 결심한 것도 ‘동주’ 뒤풀이 때 박정민의 랩을 듣고서다. 정작 박정민 스스로는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며 “촬영 내내 매일 ‘가사 쓰고, 랩하고, 내일은 어떻게 연기하나’ 고민할 게 너무 많았다”고 털어놨다. ‘노력의 천재’. 그가 2년 전 묶어낸 산문집 『쓸 만한 인간』(상상출판)에서 스스로를 지칭했던 말이다.

영화 '변산' 랩 작업 중인 래퍼 얀키(왼쪽)와 박정민. 영화 속 랩은 지난 4일 ‘변산 모놀로그’란 타이틀의 앨범으로도 발매됐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변산' 랩 작업 중인 래퍼 얀키(왼쪽)와 박정민. 영화 속 랩은 지난 4일 ‘변산 모놀로그’란 타이틀의 앨범으로도 발매됐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랩은 언제부터 좋아했나.  
“중학교 때 CB매스(힙합그룹)가 나올 때부터 즐겨 들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랩이 한 편의 시 같잖나. ‘쇼미더머니’(TV 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래퍼가 살아온 이야기를 가사에 확 풀어놓는 걸 들으면서 공감하고 많이 울기도 했다. 직접 가사를 써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랩이란 게 하루 이틀에 마스터되지 않는다. 영화에선 랩 스킬보단 학수의 진심을 담은 대사로 접근하려 했다.”
-학수의 래퍼 예명 ‘심뻑’의 뜻은.  
“그저 그런, 대충이란 뜻의 전라도 사투리다. 이준익 감독님이 지어주셨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고향에 빈손으로 돌아온 학수는 상처받을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본심을 드러내지 못한다. 쾌활한 극의 분위기 속에서 혼잣말 같은 랩은 자조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절제된 표정 연기가 랩만큼 절묘하다.

그는 “다들 감정을 어느 정도 숨기고 살지 않냐”며 “주변 캐릭터가 살아야 학수가 산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동료 배우의 연기를 받아주다가 학수의 감정이 최고조일 때 튀어나오고, 다시 참는 식의 조율을 계속했다”고 돌이켰다.

-주연으로 임한 현장이 달랐던 점은.  
“모든 게 달랐다. 선배님들이 주연으로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주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꼭 그렇게 해야지, 마음먹었다. 촬영 초반엔 의지가 넘쳤는데 내 연기와 랩만으로 점점 여력이 고갈되더라. 딴엔 티를 안 내려고 하는데 과부하가 걸리니까, 얼굴이 새카매졌다. 결국 안 울기로 했던 학수의 어머니 장례식 회상 장면에서 촬영 준비하는 동안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끝나고도 20분 내내 울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점 중심을 되찾아갔다.”

#'불안'이 나를 지배한다

박정민이 서번트증후군이 있는 피아노 천재로 분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사진=CJ E&M]

박정민이 서번트증후군이 있는 피아노 천재로 분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사진=CJ E&M]

‘그것만이 내 세상’ 때도 대역 없이 피아노 연주 장면을 찍기 위해 6개월간 매일 5시간씩 연습했던 그다. 완벽을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같다고 하자 “저란 놈은 그래야 남들 하는 것 정도 한다”고 했다. 밤낮 공부해서 들어간 고려대 인문학부를 자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시 입학한 것도 꿈꿔온 연기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매사에 치열해서, 사춘기가 혹독했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다 사춘기였다. 키도 쪼그맣고 인기도 없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은 없었는데 철저한 반항심이 있었다. 엄마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속으론 하기 싫어 죽겠고. 그러면서도 성격상 밤새 외워 시험 가채점이 잘 나와도 안심을 못 하고 나를 몰아붙였다. 학생으로서 공부를 잘하는 게 임무니까. 배우로선 그게 연기고.”

학생 시절 찍은 첫 단편 ‘세상의 끝’(2007) 이후 출연작만 35편. 스스로 대표작으론 ‘파수꾼’과 ‘동주’를 꼽았다. ‘파수꾼’에서 그가 맡은 고교생 희준이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에게 싸늘하게 돌변하던 순간은 지금도 명연기로 꼽힌다. 이 영화를 본 배우 황정민은 신인이던 박정민을 자신의 소속사 샘컴퍼니로 이끌기도 했다. 반대로,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뜨겁게 연기한 ‘동주’는 흥행과 함께 대중에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영화 '파수꾼'(2011)은 자살한 고등학생의 아버지가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 박정민(오른쪽)은 주인공 세 친구 중 한 명인 희준 역을 맡았다. [사진 CJ CGV]

영화 '파수꾼'(2011)은 자살한 고등학생의 아버지가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 박정민(오른쪽)은 주인공 세 친구 중 한 명인 희준 역을 맡았다. [사진 CJ CGV]

그래서 지난해와 올해가 박정민에겐 각별했다. 이준익 감독과 두 번째 만난 ‘변산’을 촬영한 데 이어 차기작 ‘사냥의 시간’(가제)에선 장편 데뷔작 ‘파수꾼’을 함께했던 윤성현 감독, 배우 이제훈과 다시 뭉쳤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로 빈민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위험한 범죄를 계획한 네 친구의 이야기다. “같이했던 감독님이 저를 또 한 번 불러준다는 게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사냥의 시간’은 첫날 윤성현 감독님이 모니터에 있고 제훈이 형이 촬영하는데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확 돌아간 듯했죠. 현장이 더 커졌다는 것도 뿌듯했고요. 누군가와 같이 시작해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게 의지가 많이 되고, 용기를 많이 냈어요.”

박정민의 전성기를 알리는 신호탄은 또 있다. ‘검은 사제들’(2015) 장재현 감독의 차기작 ‘사바하’에선 신흥 종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청년 신도 역을 맡아 이정재와 호흡을 맞췄다. ‘타짜’ 3편(감독 권오광)에도 최근 주연 캐스팅 소식이 들려온다. 완벽함에 다가서는 ‘노력 천재’ 박정민의 시절은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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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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