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를 받는 조양호(69) 대한항공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6일 기각되면서 대한항공 직원들이 분노하고 있다. 이번에 조 회장의 영장이 기각되면서 한진그룹 총수 일가는 모두 네 차례 구속 위기를 피하게 됐다.
이날 오전 3시20분쯤 서울남부지법 김병철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피의사실들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고 이와 관련된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어 현 단계에서 구속해야 할 사유와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조 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대한항공 비리 제보 채팅방에 성토 이어져
영장 기각 사실이 알려지자 총수 일가 퇴진을 주장하는 대한항공 직원들은 집단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다. 약 3000명이 참여 중인 '대한항공 갑질·비리 제보'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직원들은 "이게 나라냐" "총수일가 퇴진에 대한 우리의 노력이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등 푸념을 쏟아냈다. 한 직원은 "수천억원을 도둑질한 사람을 그냥 풀어주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지난 4일 출범한 민주노총 산하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도 "서울 광화문에서 '갑질근절 게릴라 홍보'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일부 대한항공 직원들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아시아나 항공 직원들이 개최하는 '박삼구 회장 갑질 및 비리 폭로' 집회에 참석할 의사를 밝히며 "양대 항공사 직원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 회장을 수사 중인 서울남부지검은 "기각사유분석 및 추가 수사 내용을 검토 후 구속영장 재청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번째 구속위기 피한 조양호 회장 일가
조 회장 일가가 구속 위기를 피한 건 이번이 네 번째다. 지난 5월 4일 서울남부지검은 '물컵 갑질' 논란으로 수사를 받던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반려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조 회장의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도 두 차례 구속위기를 면했다. 지난달 4일 서울중앙지법은 특수폭행·특수상해·상습폭행·모욕 등 7개의 혐의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에 대해 "범죄혐의에 대한 다툼의 여지가 있고 이 전 이사장이 피해자들과 합의를 통해 범죄사실에 관한 증거인멸을 시도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보름 후인 지난달 18일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김영현)도 이 전 이사장에 대해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혐의(출입국 관리법 위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이 역시 기각됐다.
조양호 회장 일가 구속영장 반려·기각 일지
5월 4일: 조현민 폭행 및 업무방해 혐의 - 검찰이 반려
6월 4일: 이명희 특수폭행·특수상해·상습폭행·모욕 등 혐의 - 법원이 기각
6월 20일: 이명희 출입국 관리법 위반 혐의 - 법원이 기각
7월 6일: 조양호 약사법 위반 등 혐의 - 법원이 기각
"보여주기식 영장청구가 문제" 지적도
법조계 일각에서는 대한항공 총수일가의 구속영장 기각보다 수사기관의 구속영장 청구가 남발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속이 곧 성과라는 인식 때문에 수사기관이 보여주기식 구속을 좇는다는 의미다.
양홍석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장은 "국내 수사기관은 증거인멸 우려 등 수사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수사가 거의 끝날 무렵 성과위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관행이 있다"며 "이미 증거를 확보하고 수사가 끝나가는 상황에서 피의자를 구속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문화가 만연해 구속 만능주의로 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한진그룹 갑질'을 언급한 것을 수사기관이 쫓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들의 수사의지와 성과를 보이기 위해 구속영장 청구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원석·조한대 기자 oh.won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