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이채필·권성동 ‘줄기각’ … 검찰 영장 제동 건 3인의 판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이언학, 허경호, 박범석.(왼쪽부터)

이언학, 허경호, 박범석.(왼쪽부터)

4일 자정 무렵 이채필(62) 전 고용노동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그러자 검찰은 즉각 기자들에게 반박 문자를 보냈다. “최근 노조와 관련된 공작사건에 대해 구속영장 기각 결정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 뭔가 다른 기준과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이 상황이 매우 유감스럽고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갈수록 높아지는 구속영장 기각률 #“혐의 다툼 여지 … 도망 우려 없다” #3명 모두 김명수 체제 이후 임명 #이언학 부장판사는 ‘우리법’ 출신 #“잣대 너무 엄격” vs “수사에 문제”

이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기존 노조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특수활동비 1억5000만원을 사용하는 과정에 관여했다는 혐의(국고손실 등)를 받았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이언학(51·사법연수원 27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현 단계에서 범죄의 소명이 부족하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올 들어 삼성전자서비스를 비롯해 노조 활동 방해 혐의로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13건) 가운데 실제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된 경우는 두 차례다. 부당노동행위로 구속영장까지 발부된 사례는 드물다. 검찰연감과 대검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 간(2013~2017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된 경우는 2016년 단 한 건밖에 없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한국 노동법은 외국에 비해 강제수단이 많고 처벌의 범위가 너무 넓다”라며 “독일 같은 경우는 노동법 위반 사건에 대해 근로자 대표, 사용자 대표가 각각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등 대부분 민사 사건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이 귀가하고 난 직후인 5일 새벽에는 권성동(58) 자유한국당 의원(강원 강릉)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번에는 허경호(44·연수원 27기)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검찰의 영장을 기각했다. 허 부장판사는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에 비춰볼 때 업무방해죄 등 범죄성립 여부에 대해 법리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영장부 판사 3명 가운데 나머지 한명인 박범석(51·26기) 부장판사는 지난달 4일 이명희(69)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조양호(69) 한진 회장의 부인인 이 전 이사장은 특수폭행·특수상해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박 부장판사는 “범죄 혐의 일부의 사실관계와 법리에 관해 다툼의 여지가 있고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영장전담 부장판사 3명의 영장 기각 사유가 모두 같은 셈이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얼마나 증거를 더 제출해야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며 “법원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최진녕 법무법인 이경 변호사는 “‘법리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법원의 표현에는 이대로 재판에 회부될 경우 무죄 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법관의 우려가 전제된 것”이라며 “검찰도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한 수사 결과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에 가까웠는지 되짚어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이채필 전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언학 부장판사는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이며 김명수(59·15기) 대법원장이 회장으로 있었던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법원의 잇따른 구속영장 기각 결정이 ‘피의자의 인권 보장’을 강조하는 김 대법원장 취임 후 법원 내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 판사 3명은 김 대법원장이 지난 2월 임명한 민중기(59·14기) 서울중앙법원장 취임 후 영장전담 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통계적으로도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률은 높아지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검찰이 피의자 5919명을 상대로 청구한 구속영장 가운데 기각률은 25.1%(1485명)에 달했다. 2015년(21.8%)과 2016년(22.2%)에 비해 높아졌다.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명백한 증거, 구속사유가 있지 않은 한 불구속 재판을 받는 것이 피고인의 방어권과 변론권 보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라며 “권력자, 힘이 센 사람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도 불구속 재판이라는 대원칙이 자리 잡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영민·박사라 기자 brad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