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자와 사건처리 이견땐 기록하라 했더니 검사들 "굳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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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수사 관련 보고에 대해 반려가 내려올 때는 평검사들이 법리를 잘못 해석해 결재를 올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검사들이 자신의 과오가 기록되길 바라겠습니까.”

이견시 기록 의무화 지침 #시행 두 달 째 “잘 사용 안해” #제외 조항 많아 사실상 선택 #“서면 지시로 투명성 높여야”

4일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검찰 ‘의사결정 기록 의무화 지침’에 대해 ”검사들이 지침에 대해 썩 호의적이지 않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의사결정 지침은 사건 처리 과정에서 상관과 이견이 생길 경우 이를 반드시 기록하게 해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이 제도에 대한 일선 검사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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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은 지난 4월 ‘검찰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휘ㆍ지시 내용 등 기록에 관한 지침’을 만들었다. 지침에는 상급자가 결재를 반려하거나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지휘ㆍ지시를 하는 경우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에 입력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피의자에 대해 주임 검사는 ‘구속’으로 결재를 올렸는데 부장 검사가 ‘불구속’ 지시를 한다면 이런 지시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검사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오타ㆍ문구 수정, 죄명ㆍ적용법조 누락이나 의율착오 등 당해 의사결정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수도권 지검의 한 검사는 “결재가 반려되는 경우 거의 90% 이상이 ‘법리 검토를 다시 하라’ ‘증거를 보완하라’는 지시가 붙는데 이는 의사결정 기록 의무화의 제외 조항에 해당한다”며 “결재가 반려되더라도 대부분 제외 조항인 경우가 많아 기록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다른 검사도 “수사 지휘에 토를 달면서까지 굳이 기록을 남기는 검사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대검은 제도 도입 후 기록 이용 건수에 대해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다.

1월 도입된 ‘검사의 이의제기 지침’ 역시 실제로는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월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단은 당시 대검 간부들의 직권남용 혐의 기소 여부를 두고 문무일 검찰총장과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사건을 처음 폭로했던 안미현 춘천지검 검사와 수사단은 공식적인 이의제기권을 사용하지 않았다.

문무일 검찰총장.

문무일 검찰총장.

당시 문 총장은 검찰 직원들에게 보낸 e메일에서 “검찰 내부의 의사결정 시스템과 소통의 방식이 시대변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봤다”며 검찰 의사소통 시스템을 손질하겠다고 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이견이 ‘항명’ 사태로까지 번진 데 대한 반성이었다.

대검도 “이견 발생 시 이의제기가 의무에 가깝도록 지침을 개선하겠다”고 했었지만, 결국 지침을 개정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검 관계자는 ”이의제기는 상호 토론을 거쳐서 해소가 안 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봐야 하는데 무조건 의무로 하는 것은 정당성이 모호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상명하복 문화에서 내려오는 지휘가 부당한지 검사들이 선택적으로 판단해 기록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도록 맡길 게 아니라 애초에 서면 지휘 비율을 늘려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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