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세 번의 시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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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여길 어떻게 올라간 게야?" 아무리 첫 바위라고, 후등으로야 못 갈 길이 없는 나에게도 답이 안보인다. 결국 다리에 쥐 나고 팔에 펌핑 나며(근육이 부풀어오르는 현상) 당겨주는 자일에 기대어 천신만고 끝에 오른다. 하긴 웬만해선 추락을 '먹는' 법이 없는 우리의 리더 최모씨도 여기서 세 번이나 대차게 떨어졌다. 선인봉 5.12 세 개의 길 중 하나인 경송 B길(사진), 드디어 와이어에 확보줄을 걸고 바싹 타들어가는 목구멍으로 물 한모금을 넘기며 물었다. 대체 여길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오르기로는 우여곡절이었으되 답은 간단하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결국 가게 된다." 그런가? 음, 그렇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조금쯤은 안다. 그것은 포기의 유혹에 맞서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나로 하여금 그걸 알게 한 것은 인수봉도 선인봉도 아닌 청계산이었다. 8년 전 첫 산행지 가야산은 잠들어 있던 온몸의 세포들을 구석구석 흔들어 깨웠다. 다시 잠들지 않는 한, 깨어난 자에게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해야 했던 한 주일 후 청계산행은 그 고통으로의 출발이었다.

첫 번째 포기에의 유혹은 이른 아침 귀를 때리는 자명종 소리와 함께 온다. 일주일에 하루뿐인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 쏟아지는 잠을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며 일어난다.

두 번째 포기에의 유혹은 산에 들고 1시간 동안이다. 운동이 대개 그렇듯이, 산행 역시 시작 1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 이제 시작인데 언제 여길 다 올라가나! 벌써 이렇게 힘이 드는데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밀려드는 의심을 젖먹던 힘을 다해 쫓아내며 걸음을 떼놓는다. 세 번째 포기에의 유혹은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뻣뻣해지는 능선 올라 안부의 막걸리 장수 앞에서 온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막걸리 한 사발 꿀꺽, 하얗게 썰어놓은 양파 한쪽 된장에 쿡 찍어 씹으면 다 끝난 것 같다. 매봉이야 뭐 다음 주에 가지. 오늘만 날인가? 몰려오는 피로를 죽을 힘을 다해 몰아내며 다시 일어선다. 그래 오늘만 날이다. 나에게 내일은 없다!

매주 그러기를 넉 달, 계절 하나를 통과하자 고통이 반으로 줄었다. 비로소 숲이 보이고 바람이 느껴졌다. 기억이 날 리야 없지만 돌 갓 지나 떼어놓았을 첫 걸음마가 그리 힘들었을까? 산에 들어 다시 배워야 했던 걸음마의 기억은 청계산을 무대로 펼쳐진 한 편 드라마였을지 모르겠다.

올해 첫 바위가 늦었다. 언제 날씨 탓하고 바위 올랐으랴마는 비 피하고 바람 피하고 꾀를 부리다 나니 선인봉 가는 도봉산 들머리에는 어느새 진달래 꽃잎이 활짝 열려 있었다.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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