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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관성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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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저녁 어떻게 해?"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온 날, 나는 아내에게 전화부터 건다. 집에는 둘째만 있다. 큰아이는 학교에서 야간자습 중이고, 학습지 교사인 아내는 아직 일하는 중이다. 저녁도 못 먹고 밤 늦게까지 일하고 있는 아내의 목소리에는 허기와 피곤이 묻어난다.

"마치려면 한참 멀었어. 겸이랑 먼저 챙겨 먹어."

"뭐 먹을 건 있어?"

"참, 오늘 바빠서 그냥 나왔는데… 어떡해?"

"할 수 없지. 알았어."

나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다. 대개는 아내가 아침에 요리를 해놓고 출근한다. 가끔 내가 먼저 들어온 날이면 아내가 장만해 놓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거나 가스레인지에 데워 아이들과 먹는다. 그러나 오늘처럼 아무것도 없으면 낭패다. 밑반찬이라도 좀 있나 싶어 냉장고를 뒤지지만 먹을 만한 것은 없다. 나는 슬슬 짜증이 난다. 냉장고 속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두부와 썩기 시작한 반찬이 들어 있었다.

멋진 남편은 요리를 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근사한 남편이 아니다.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안줏거리인 '골뱅이 소면' 정도다. 이제 중3인 둘째 녀석과 저녁 대신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겨우 참치 통조림을 찾아 참치 비빔밥을 만든다. 요리도 하나 못 하는 아빠를 둔 둘째는 시장을 반찬 삼아 꾸역꾸역 저녁을 먹는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아내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슴속에서 끓기 시작한다.

남편과 자식을 냉장고 속 음식처럼 방치한 아내가 돌아왔다.

"저녁 먹었어?"

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들어서는 아내를 나는 썩기 시작한 반찬 같은 얼굴로 맞는다.

"저녁을 먹고 자시고 간에 냉장고가 왜 그래?"

"냉장고가 왜?"

"몰라서 물어? 냉장고가 아니라 완전히 '부패고'던데."

"봤어? 미안, 곧 치울게. 아, 배고프다. 뭐 먹었어?"

"도대체 그게 뭐야?"

"나중에 또 먹으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이제 그 이야긴 그만 하시지."

"안 먹으면 그때 바로 버려야지. '아끼면 똥 된다'는 말도 몰라?"

"그걸 누가 몰라요. 근데 당신, 너무하는 거 아냐? 어쩌다 한 번 그런 걸 갖고. 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하다 온 사람에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화를 낼 사람은 난데 왜 아내가 더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아내는 코뿔소처럼 콧김을 뿜어내며 씩씩거린다. 코뿔소 아내는 고무장갑을 찾아 끼고 냉장고 문을 연다.

"누가 지금 치우라고 그랬어. 평소에 좀 잘하라는 거지."

오래된 음식을 정리하고 있는 아내를 보니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과 달리 말은 엉뚱하게 나와버린다. 그것도 버럭.

"밥 안 먹을 거야? 안 먹을 거면 이것도 버리고."

아내는 대답도 없이 쿵쿵 걸어와 식탁 위의 밥을 가져간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다. 아내는 밥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털어버린다. 뭔가 단단히 잘못돼가고 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코뿔소 아내가 뿜어낸 콧김 때문인지 황사 심한 날처럼 눈앞이 뿌옇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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