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현대차 수사, 불구속 원칙 지켜지는 계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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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번 검찰 수사를 지켜보는 국민은 참으로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재계 서열 2위로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를 넘보는 현대차그룹이 뒤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계열사를 동원해 편법으로 경영권 승계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비를 통해 부실 계열사의 빚 550억원을 탕감받았으니 그만큼 국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을 축냈다. 관련 임직원들에 대한 법적 책임 추궁이 불가피한 이유다.

현대차 임직원, 특히 정몽구 회장의 신병처리 수위를 두고선 두 가지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있다. 경제 정의를 실현하고 이런 불법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한쪽에선 경영 공백과 경제 악영향을 우려해 불구속 처리를 주문하고 있다. 검찰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2001년 8월 검찰이 몇몇 언론사주들에 대해 수사할 때를 비롯해 누차 불구속 수사.재판의 확대를 촉구해 왔다. 그것이 법의 정신이고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에서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일정한 주거가 없고 증거 인멸이나 도주 염려가 있는 때에 한해 피의자나 피고인을 구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구속 수사.재판이 원칙이고 구속은 예외적인 경우라는 취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법 현실은 구속을 징벌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법원과 검찰이 불구속을 확대하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1월 구속영장 발부 요건을 크게 강화하는 내용의 '인신구속 사무처리 기준'을 마련했고, 검찰도 구체적인 구속영장 청구 기준을 마련 중이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동국대 강정구 교수를 불구속 수사토록 수사 지휘권을 발동하면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표방하는 무죄 추정 원칙 및 불구속 수사 원칙을 내세우지 않았던가.

자동차 산업은 국가 기간 및 수출 주도 산업으로 제조업 생산과 고용의 11%를 차지하며, 연관 효과가 큰 국가 전략산업이다. 굳이 이런 경제적 요소들을 따지지 않더라도 가급적 구속 수사는 신중해야 한다. 그것이 법과 원칙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기업인에 대한 여론이 나쁘다는 이유로 불구속 원칙에 예외를 둘 수는 없다. 현대차의 경우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은 뒤 사법부의 판단 결과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지우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현대차도 뼈를 깎는 자성과 다짐이 필요하다. 정몽구 회장 부자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약속한 1조원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투명경영.윤리경영을 실천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