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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을 카지노 칩처럼 보는 주주행동주의자, 한국 노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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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호 14면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 본래는 주주들이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기업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주주가치를 높인다는 의미다. 하나 우리나라에선 이를 ‘기업에 대한 공격’ 혹은 ‘구조조정의 훼방꾼’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버린의 SK에 대한 공격(2004), 최근 엘리엇의 삼성과 현대차에 대한 잇단 공격 등의 방식으로 주주행동주의가 등장한 탓이다. 이 때문에 주주행동주의와 관련한 우리 기업들의 관심사는 ‘이들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주주행동주의 양상을 글로벌 전문가는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 최근 증권학회 전문가 세미나에 초청돼 방한한 글로벌 위기 대응 소통 전문가인 피터 베렌지아(Peter Verrengia) 플레시먼힐러드 기업컨설팅 파트 대표에게 들어봤다. 그는 2004년 SK의 소버린 대응 자문을 계기로 아시아 기업들의 특수상황 자문을 하고 있다.

글로벌 위기대응 전문가 베렌지아 #오너 경영 한국 기업 투명성 낮아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의 표적 #투기자본의 공격 일상적 리스크 #기업들 방어만으론 이길 수 없어 #글로벌 한국 기업 성장에만 신경 #주주와 소통방식은 로컬기업 수준 #평소 주주와 개방적으로 대화하고 #충분한 정보 제공해 신뢰 얻어야

베렌지아 대표는 “행동주의 투자가들은 이미 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고 했다. 지난해 행동주의 투자가가 미국 외 지역에서 진행한 캠페인 중 31%가 아시아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2011년(12%)보다도 비중이 확 늘어난 것으로 아시아 기업, 특히 한국 기업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 됐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기대응 소통 전문가인 피터 베렌지아 플레시먼힐러드 기업컨설팅 파트 대표는 한국 기업의 복잡한 지배 구조와 가족 승계에 주력하는 경영관행, 정보공개의 폐쇄성 등이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에게 공격의 미끼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글로벌 위기대응 소통 전문가인 피터 베렌지아 플레시먼힐러드 기업컨설팅 파트 대표는 한국 기업의 복잡한 지배 구조와 가족 승계에 주력하는 경영관행, 정보공개의 폐쇄성 등이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에게 공격의 미끼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행동주의 투자가들이 아시아, 특히 한국으로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일본·홍콩 등은 아시아국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공격 대상으로 꼽힌다. 글로벌 규모로 성장한 기업들이 많아 투자가들을 끌어들일 만한 환경과 외형적 조건을 갖추었지만 재벌과 같은 패밀리 비즈니스 성격이 강하다는 점, 서구 기업 기준으로 볼 때 여전히 투명성이 낮다는 점 등의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시아 기업의 경영진들은 주주 이익이 아닌 오너 가족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투자가의 입장에선 기업 측에 주주의 이익을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M&A나 구조조정을 공격 모멘텀으로 활용

그러나 엘리엇의 삼성, 현대차 공격처럼 최근의 행동주의 투자가들은 단순히 투명성이나 주주가치 실현을 입증하라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단기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행동주의 투자가의 층위는 다양하다. 모두 같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행동주의 투자가들 중엔 기업의 불투명성을 제거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기업과 윈-윈하려는 그룹도 많다. 블랙록 같은 글로벌 투자자는 투자기업에 사회적 가치 실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큰 기업의 이벤트를 활용해 단기 이익을 노리고 소란을 떠는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기업의 장기적 가치에 관심이 없고, 기업을 카지노의 칩처럼 보는 경향도 있다. 특히 기업이 인수합병(M&A)이나 구조조정을 시도할 때 변화의 리스크를 공격 모멘텀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대자동차의 지배구조개편안을 중단시킨 엘리엇의 공격도 같은 유형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정도 지분을 가진 엘리엇의 소란에 주총이 무산됐다는 것이다. 평소 주주들과의 신뢰관계가 제대로 형성돼 있었다면 과연 결과가 같았을까. (실제로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서스틴베스트 등 한국 자문사들도 엘리엇과 같이 개편안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기업은 정보를 공개하고, 자신들의 구조조정안의 이점에 대해 주주들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현대차가 이를 제대로 해냈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주주들을 비롯한 시장의 믿음을 얻지 못해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말인가.
“기업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정보가 충분치 않아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기업이 변화를 추구하는 시점에는 리스크와 이익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이 되었으면서도 주주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나 정보제공 차원을 보면 과거 로컬기업 때와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성장과 생산 플랫폼 확대에만 신경쓴다. 글로벌 기업이라면 마땅히 주주와 소통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기업이 모든 구조조정 정보를 다 공개할 수는 없다. 과정이 혼란스럽지 않으려면 보안을 유지하며 작업하는 방식도 필요하다.
“물론 모두 공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주주들과의 신뢰관계는 충분한 정보를 주었을 때 형성된다는 점에서 균형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주들은 경영진이 경영을 잘 해서 기업이 발전하기를 바란다. 잘 경영하고 있다는 확신만 주면 된다. 경영진의 비전과 시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리스크 관리 모델을 잘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리엇은 엄청난 두께의 연구보고서를 던지며 자신들의 대안을 제시하고, 마치 모든 투자자를 위해 자신들이 좋은 대안을 찾아왔다는 듯 행동한다. 이런 경우 현대차가 엘리엇의 대안을 거부해야 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고, 자신들의 개편안이 어떻게 미래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한다면 다른 투자자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엘리엇은 산업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 반면 현대차는 자기 회사의 일이니 자신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더 많은 계획과 비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주주들과 사회의 동조를 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평소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을 방어하기 힘든 이유를 내부적으로도 찾아야 한다.”
한국기업-주주행동주의자 주요 분쟁사례

한국기업-주주행동주의자 주요 분쟁사례

1% 지분 엘리엇 소란에 현대차 주총 무산

정말 대화부족이 문제인가. 예를 들어 엘리엇의 삼성·현대차 공격 당시에 이들 기업도 대화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공격이 시작됐을 때의 대화는 방어 전략이 아니다. 선제적 대화, 기업의 개방적 태도 등으로 많은 주주들의 신뢰와 지지를 평소에 얻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공격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방어를 시작할 수 있다.”
기회주의적 행동주의자들은 미국 기업들도 공격했고, 이에 많은 미국 기업들도 자사주 매입과 소각에만 10년 간 7조 달러를 썼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구 기업 수준의 대화와 정보 공개가 방어를 위한 최선책이라는 말은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물론 기본 방어 전략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기업은 방어만 말한다. 그런데 방어만으론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장기적 전략은 방어가 아닌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투기자본의 공격은 자본시장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리스크이다. 미국 기업들도 자본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하는 비용이 크고 주주의 압박도 심해 자본시장을 떠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의 상장기업은 10년 전엔 6000개였는데 지금은 3000개로 줄었다. 사모펀드에 회사를 팔거나 지배주주의 우호 주식 비중을 확 늘리는 등의 전략으로 돌아선 것이다.”
최근 엘리엇의 공격으로 현대차의 지배구조개편안이 좌절됐을 때, 시장에선 한국 정부의 반재벌 정책이 투기자본에게 공격기회를  만들어줬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행동주의자들의 동기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공격 타깃이 되는 이유는 복잡한 기업 구조, 지배 구조, 적은 지분은 가진 오너의 지배, 상속 등 가족 승계에 대한 집착과 같은 독특한 문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 같은 것이다. 정부의 정책 기조도 하나의 요인일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 요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행동주의자들이 활동을 시작할 때는 대중 여론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기업 내부에 일어나는 갈등 요인들에 주목한다. 기업 그 자체의 문제가 더욱 크다.”
마지막으로 한국 기업들에 주주행동주의시대에 대응하는 방법을 조언한다면.
“간단하지만 어려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간단하게는 주주와 기업의 입장차이를 줄이는 것이다. 주주와 기업이 보는 가치와 리스크가 다르면 이것이 디스카운트의 요인이 된다. 경영진이 주주의 입장에서 기업을 바라보는 노력을 하면 이 간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행동하기엔 쉽지 않다. 기업이 주주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트레이닝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렵다. 그러나 해내야 하는 일이다. 이젠 소수의 거버넌스 전문가가 복잡하게 짜놓은 지배구조로 기업을 지배할 수 있은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양선희 선임기자 su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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