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운동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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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호 34면

1987년 여름은 뜨거웠다. 직선제 개헌을 얻어낸 6월 항쟁 이후 7~9월 3개월간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에 번졌다. 연인원 200만 명이 시위에 나섰고 3337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계는 이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부른다. 87년 6월 말 2742개이던 노동조합은 89년 말 7861개로 늘었고, 노조원도 100만여 명에서 190만여 명으로 두 배가량 증가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계의 요구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노동계 전성시대’ 걸맞은 책임감 필요 #약자 외면하면 제대로 된 진보 아니다

2018년의 노동계는 31년 전과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달라졌다.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노동계는 더 이상 박해받는 사회운동 세력이 아니라 ‘권력’이 됐다. 전체 국회의원 중 노동계 출신은 제1, 2당 대표를 포함해 23명이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엔 6명이나 포진했다. 고용노동부 장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등 요직은 물론 공단과 대학 이사장까지 노동계 인사들이 차지했다. 가히 ‘노동계 전성시대’다.

친(親)노동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조 편향 정책이 이어졌다. 지난 정부에서 노동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양대 지침과 성과연봉제는 단칼에 폐기됐다. 대신 정규직화·최저임금 인상·노동시간 단축 같은 친노조 정책들이 쏟아졌다. ‘노조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경제계의 우려는 무시됐고 기업의 부담만 커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노동계의 과도한 요구는 계속됐다. 6개월간 유예된 근로시간 단축에 노동계가 대정부 투쟁을 예고하며 반발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대기업 근로자보다 중소기업 근로자에 충격이 크다. 소득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 있다. 대기업의 힘센 노조는 임금 삭감 없이 근로시간 단축을 관철할 힘이 있지만 대기업이 추가 고용을 하지 않으면 생산량은 줄어들고, 이는 협력업체의 수주량 감소와 해당 근로자의 소득 감소로 이어진다. 민주노총은 “정부·여당이 지방선거 압승 이후 노동자의 절규는 듣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노동자의 절규’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조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양대 노총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감당할 몫이다.

최저임금도 마찬가지다. 양대 노총은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한 최저임금법 개정에 반발해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대화에 참여를 거부하고 최저임금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좋은 일자리에 속하는 대기업·공기업 노조는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만끽할 수 있다. 반면 최저임금 인상에 취약한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소처럼 노조가 없는 노동시장의 약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아우성을 친다. 오죽하면 노동계 출신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조차 ‘친정’을 비판할까. 그는 어제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1만원은 경제 흐름을 봐가면서 추진해 나갈 수밖에 없는데 노동계가 무조건 올리라고만 하니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홍 원내대표는 “대한민국 노조도 이제 좀 바뀌어야 한다. 노동계도 이제는 우리 경제사회 주체 중 하나로서 어떻게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백번 옳은 말이다. 정부도 지난 1년간의 ‘노정(勞政) 유착’에서 벗어나 노동계에 할 말은 하면서 건전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다. 노동계는 공감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 코스프레’를 중단하고 손에 쥔 권력에 걸맞게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들이 빛나는 역사로 기리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 시대의 약자를 제대로 보듬어야 한다. 희망 잃은 청년과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의 눈물을 외면하는 노동운동이 제대로 된 진보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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