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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선거의 심리- 환상을 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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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선거가 시작되면서 후보자들은 자신이 가장 적임자라는 환상에 점차 빠진다. 여러 정보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수집하고 신뢰하는 편향의 심리 때문이다. 웃으며 악수해 주는 모든 사람, 격려의 말을 건네 오는 모든 사람이 투표 당일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다.

환상에 빠진 후보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해 공약이나 정책적 측면에서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보다는 선정적인 홍보, 상대 후보 비방,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리는 정치적 공작에 치중한다. 특히 비방이나 부정적인 루머는 상대 후보자뿐 아니라 유권자까지 여기에 주의를 집중하게 해 공약이나 정책적 측면을 간과하게 만든다.

후보자들이 엉뚱한 곳에 관심과 노력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유권자의 합리적 선택 기준이 될 수 있는 공약과 정책은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후보자들의 공약은 서로 상당히 비슷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유권자로 하여금 공약이나 정책을 무시해 버리게 만든다. 또한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유권자에게 금품 향응이나 지연.학연 등의 관계를 강조하고, 선정적인 홍보를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후보자가 많다.

그러나 후보자 개인의 특성보다 후보자가 제시한 공약이나 정책에 더 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유권자들은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2000년 미국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 이유를 조사한 한 연구에서 공약과 정책 제시가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고 답한 사람이 정당이나 후보 개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답한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 선거 당시에는 6.7% 정도였던 정책 투표가 80년대 선거 때 세 배가 넘는 22.3%로 증가했다. 국민의 정치의식 향상에 힘입어 현재에는 더 많은 유권자가 정책 투표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유권자를 설득하는 데는 '누구'인지보다는 '무엇'인지에 해당하는 공약과 제시된 정책의 내용이 더 효력을 발휘한다.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없이 그 사람의 이미지만 전달해서는 유권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의 의도대로 설득할 수 없다.

한 심리학 실험 결과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보다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가 더 빨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사람에 대한 정보보다는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내용의 논점이 타인을 설득하는 데 더 중요했다. 평소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체계적이고 타당한 논점 제시에 의해 극복될 수 있으며, 타인을 설득하는 데 있어 논점 없이 이미지만 강조한다면 그 설득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렇듯 유권자들은 공약이나 정책에 의해 더 영향을 받고, 점차 많은 국민이 공약과 정책에 입각한 투표를 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후보자들은 이러한 국민 의식의 성숙에 못 미치고, 오히려 유권자의 합리적인 투표를 방해하고 있다. 자신의 공약과 정책에 자신감과 확신이 있는 준비된 후보라면 유권자에게 구체적이고 뚜렷한 공약을 제시하는 데 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하여 정책적 쟁점에 민감한 유권자를 만족시키고 더 나아가 정치적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었던 고학력자의 기권율 또한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낙선한 후보자들은 부조리와 불법 선거의 책임을 또다시 유권자들에게 전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전에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공약이나 후보와 정당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정보를 유권자들에게 충분히 제공했는지를 후보자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준비된 후보자의 구체적이고도 실천 가능한 공약과 정책이 유권자의 합리적인 투표를 이끌어 내고, 이것이 바로 한 단계 발전한 선거 문화를 이룬다는 것을 기억하자.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