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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월요일 출근길 금요일 퇴근길, 지하철이 와도 안타는 그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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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르포]승강장 배회하던 정장 차림 중년 남성, 성추행범으로 변했다

19일 오전 8시쯤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 승강장(고속터미널역 방향). 성추행·몰카(불법촬영)범 단속에 나선 서울 지하철경찰대 황성하(47) 형사가 출근길 인파를 유심히 살폈다. 황 형사 눈에 인파 뒤에 서 있는 한 남성이 들어왔다. 이 남성은 두 차례 전동차가 들어왔지만 타지 않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줄을 서지도 않았다. 1~2차례 황 형사 쪽을 보더니 들어오는 열차를 타고 사라졌다.

지난달 지하철 9호선 당산역에서 여의도역 방향으로 향하는 전동차 내에서 여성을 손으로 추행하는 모습. 사진 속 범인은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 중앙일보 동영상 캡처]

지난달 지하철 9호선 당산역에서 여의도역 방향으로 향하는 전동차 내에서 여성을 손으로 추행하는 모습. 사진 속 범인은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 중앙일보 동영상 캡처]

그때였다. 같은 조인 정현배(35) 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성추행 의심자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황 형사는 승강장 중간에서 맨 끝으로 인파를 피하며 달려갔다.

집중단속 시작된 지하철 성추행 단속 현장 가보니

두 형사는 180㎝가량 되는 키에 감색 정장을 입은 50대 남성을 따라붙어 전동차를 탔다. 급행열차는 승객들로 옴짝달싹하기 쉽지 않았다. 이 남성은 한 여성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는 두 정거장(급행열차 기준)을 가는 사이 손등으로 수차례 여성의 엉덩이를 접촉하거나 쓸어 올렸다. 피해 여성이 두 차례 뒤를 돌아봤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뚝을 여성의 어깨에 올리기도 했다. 이 모습을 승객으로 위장한 두 형사가 앞뒤에서 휴대전화로 찍었다. 증거 확보를 위해서였다.

이 남성은 9호선 동작역에서 내렸다. 형사들은 피해 여성에게 재빠르게 명함을 건넸고 뒤를 따랐다. 이 남성은 반대편 승강장으로 갔다. 전동차를 타고 자신이 출발했던 여의도역으로 와서는 다시 고속터미널역 방향 승강장으로 갔다. 그는 형사·기자와 1~2차례 눈이 마주쳤다. 눈치를 챈 듯했다. 갑자기 출구 방향 계단으로 올라갔다.

개찰구에 다다를 때쯤 뒤따라온 황 형사가 남성의 어깨를 잡았다. “전동차 내부에서 여성 엉덩이에 손등을 접촉한 혐의로 조사하겠습니다. 동행하시죠.” 그는 범행을 부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순순히 인정했다. 1시간가량 조사가 이어졌다.
추행범 이모(52)씨는 1남1녀를 둔 가장이자, 회사원이었다. 조사에서 이씨는 “왜 추행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에 의거해 300만원 이하 벌금이나 1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예정이다.

지난달 전동차 내에서 특정 신체 부위를 밀착해 추행하는 모습. 사진 속 범인은 경찰에 검거됐다. [사진 중앙일보 동영상 캡처]

지난달 전동차 내에서 특정 신체 부위를 밀착해 추행하는 모습. 사진 속 범인은 경찰에 검거됐다. [사진 중앙일보 동영상 캡처]

정현배 형사는 “성추행범들은 들어오는 열차는 보낸 채 승강장을 배회하며 범행 대상을 찾는다”며 “이들은 만원 전동차를 타거나 뒤에서 승객을 미는 모습도 다르고, 일부러 붐비는 전동차로 옮겨 타기도 한다”고 말했다. 황 형사는 “월요일 출근길, 목·금요일 퇴근길이 성추행범들이 기승을 부리는 때”라고 설명했다.

이날 두 형사는 퇴근길 시간대(오후 5시30분~오후 8시)에도 단속을 벌였다.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고속터미널역 구간을 오갔다. 의심자 두 명의 뒤를 밟았지만 범행 현장을 포착하진 못했다. 하지만 다른 조 형사들이 성추행범 1명을 붙잡았다. 범인은 20대 남성으로 보였으나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성추행 녹화 영상과 피해자 진술이 필요한 이유다.

서울 지하철경찰대에 따르면 하루 19~20개 조가 환승역을 중심으로 성추행·몰카범 단속을 한다. 지난 17일 서울 지하철 2·7호선 대림역 내 에스컬레이터에서 20대 여성의 치마 속을 휴대전화로 촬영한 A씨(30)를 붙잡기도 했다. 경찰대는 지난달 17일부터 지하철 성범죄 집중 단속을 벌여 성추행 99건, 몰카 77건 등 176명을 검거했다(20일 기준). 또한 지하철 역사 내 남·녀 화장실 883곳의 몰래카메라 설치 여부도 수시 점검하고 있다.

채정수 서울 지하철경찰대 부대장은 “경찰은 성추행ㆍ불법촬영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가지고 집중 단속을 벌이고 있다”며 “시민들도 범행을 목격하면 적극적으로 신고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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