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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영선칼럼

복합화의 꼭짓점 춤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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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반 논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논쟁의 불길을 지금 제대로 잡지 못하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와 '바른 FTA 실현을 위한 국민운동본부'로 나뉘어 맞대응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언론도 찬반 논쟁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 마련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학계의 전문 지식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협상을 직접 추진하고 감독해야 할 청와대.여의도, 그리고 실무 부처도 논의의 정곡을 꿰뚫지 못하고 있다.

한.미 FTA는 단순히 한국과 미국의 무역협정이 아니다. 21세기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국운을 결정하게 될 세기의 협정이다. 협상의 성공과 실패가 21세기 한국의 흥망을 좌우할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21세기 비전을 가지고 고도의 국제정치 협상과 국내정치 협상을 치밀하게 추진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운명의 갈림길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다. 1880년 여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중국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둘러싸고 대토론이 시작된다. 19세기 국제화를 비판하는 척화(斥和)상소와 지지하는 개화상소가 치열하게 맞섰다. 그 와중에 조정의 논의도 엇갈렸다. 고종은 척화상소를 무마하기 위해 1881년에 척화윤음을 발표해야 했고,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개화교서를 반포했다. 이러한 정국의 혼란 중에 조선은 국제 수준의 국제화를 본격화하지 못하고 갑신정변(1884년) 이후 '잃어버린 10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조선의 운명은 기울어졌다. 고종을 선두로 하는 조선형 국제화의 꼭짓점 춤 대신에 어설픈 척사와 개화의 양극화 춤을 춘 결과였다,

19세기의 비극을 21세기에 반복하지 않으려면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비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보탑은 보통 탑이 아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기 위해 인도에 처음 탑이 세워진 이후 지난 2500년 동안 지구상에 건축된 수많은 탑 중에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법화경'에 그려진 다보궁을 재현하고 있다. 다보탑의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바라다보고 있으면 4각.8각.원의 모습이 절묘하게 얽혀 만들어 내는 복합공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통일신라의 장인들은 21세기의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복합화의 구체적 형상을 이미 1250년 전에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으로 전 세계의 복합화 구상을 선도할 수 있었던 선조를 두고 있는 한국인이 21세기에 다시 한번 복합화 구상을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서서 이끌 수 있다면 미래 한국의 앞날은 밝다.

21세기 한국의 장래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양극화의 춤을 졸업하고 복합화의 춤을 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한.미 FTA도 현재와 같은 세계화와 반세계화라는 양극화의 논쟁 속에서 바라다보는 한 국내, 그리고 국제정치적으로 타협의 공간을 찾기 어렵다. 다보탑이 보여주는 복합화는 당연히 세계화.지역화, 그리고 지식화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동시에 자주화.지방화.복지화.개인화를 품고 있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정부는 복합화의 시각에서 미국과 어떻게 국제정치적으로 협상하고, 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국내정치적으로 어떻게 입체적으로 조종해 나갈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FTA를 둘러싼 정치권과 시민사회, 언론의 논쟁도 양극화의 논리를 하루빨리 벗어나 복합화의 논리로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다보탑을 쌓은 장인들의 후예로서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작게는 노무현 정부의 사활이, 크게는 21세기 한국의 국운이 달린 문제다. 축구뿐만 아니라 매력의 월드컵, 그리고 행복의 월드컵에서 세계 4강, 우승의 기쁨을 맛보려면 춤의 모양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 세계화와 반세계화,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양극화 춤에서 다보탑처럼 안과 밖의 모든 힘이 한반도에서 어우러지는 복합화의 꼭짓점 춤으로.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