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28. 서독 광부 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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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광부 시절의 필자. 뒤셀도르프의 하숙집 아이들과 함께 찍었다.

'낭만주먹 낭만인생'에서 내'밑천'이 몽땅 드러나고 있다. 휴가 미귀(未歸)로 인한 일등병 제대, 서자 출신, 대학 2년 중퇴, 10대 시절 주먹질…. 부끄럽지만, 나는 그런 일들을 굳이 감추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이제 한참 나이인 스물아홉(1964년)에 떠나 30대 시절을 보냈던 서독 광원 생활 3년과 프랑스 체류기간 3년을 밝히려 한다. 역시 '바닥 생활'이었는데, 거기에 뛰어든 것은 대학 2년 중퇴와 중 노릇, 군 생활 등에 대한 환멸만은 아니었다. 간단하다. 배가 너무도 고팠고, 그래서 돈을 벌고 싶었다.

고시 공부에 실패한 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독 광원 제2차 선발대 모집 인원은 300명. 광원 출신 20%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학 강사, 관료 출신 등 고급 인력이었다. 당시 국내 봉급 생활자의 세 배 이상 되는 월급을 준다는데 혹해서 내 친구인 시인 이추림 등 네 명과 함께 응시했다. 무슨 영문인지 나 혼자 합격했다.

"다시는 이땅을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괜스레 비장했다. 젊은 날의 그런 섣부른 객기와 함께 루프트한자 비행기에 올랐다.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해 여섯 달 견습 생활을 거쳐 탄광 현장에 투입됐다. 여러 증언이 이미 나왔지만, 막상 가보니 독일 탄광은 한국의 무연탄광산과 사뭇 달랐다.

유연탄 광산은 겉으로 보면 그냥 평지다. 대신 지하 2000m 아래의 탄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가는 데만 3분여. 그러고는 다시 탄차로 30분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마이스터(반장)의 지휘 아래 2인1조로 채탄 작업을 한다. 작업등을 부착한 안전모, 가스 마스크, 삽, 도끼 따위로 완전무장을 한 채로….

탄층 높이는 80~150cm. 따라서 무릎 신발(크니슈에)을 바닥에 대고 벌벌 기어다니며 작업을 한다. 삽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게다가 잔뜩 웅크린 채 순전히 팔힘으로만 하는 삽질은 정말로 버거웠다. 힘을 좀 쓰는 내가 버겁다면, 남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 쓴 가혹한 노동의 실체를 거기에서 맛보았다.

작업 중 찾아오는 졸음과 탈진, 거기에 몸을 휘감는 젊은 날의 분노와 뼛속까지 스미는 외로움…. 비참했던 얘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그때 재확인한 것이 먹고살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하는 노동과, 잠시 시늉해보는 노동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점이다.

보통 '황구라'로 통하는 내 후배인 소설가 황석영과, '방구라'로 불리는 나는 그 점에서 다르다. 황구라는 70년대 유명한 단편소설'삼포 가는 길'을 썼고, 그걸 쓰기 위해 '노가다'일을 몇 개월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삶의 현장을 모르는 법이다.

어쨌거나 '주먹꾼'은 내 평생의 업보인가 보다. 예기치 않았던 싸움질로 탄광이 한때 시끄러웠다. 얼마 전 광원 시절의 내 동료들 여럿이 40년 만에 나의 근무처인 경복궁으로 찾아와서 그 얘기로 꽃을 피웠는데, 만화가 따로 없는 그 얘기가 다음 회 스토리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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