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설득한 월드 리더" 대외이미지 노리며 싱가포르 오는 트럼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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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G6 정상과 트럼프 대통령 보호주의 무역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AP=연합뉴스]

9일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G6 정상과 트럼프 대통령 보호주의 무역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AP=연합뉴스]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난 9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등 여러 언론이 웹사이트에 머릿기사와 함께 게재한 사진이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앞에 놓여진 테이블을 짚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이다. 메르켈 총리 옆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유럽 정상들이 서서 트럼프 대통령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디언은 “트럼프 대통령은 G7 정상회의를 떠나 자신의 임기 중 가장 중대한 회담을 위해 싱가포르로 향했다. 전통적인 미 동맹국들 사이에 좌절과 혼란을 남긴 채로 말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사진 한 장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처한 국제정치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를 제어하려는 G6 대 이에 반발하는 이단아적 지도자 트럼프 대통령이 대립하는 양상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규칙에 기반한 무역체제’를 강조한 G7 공동성명에 반발하며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곤 트위터에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농부, 노동자, 기업들에 엄청난 관세와 무역장벽을 적용하는 것을 용납치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경제·무역 뿐 아니라 안보 문제에서도 미국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던 전통적인 동맹·우방국들과 이처럼 등지는 상황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이어진다. 기존의 미 대통령들과 전혀 다른 트럼프식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우고도 자신의 세계적 리더십을 확고하게 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10일 밤 싱가포르 파야 라바 공군기지에 도착한 그의 마음 속에는 북한의 독재자를 설득한 유일한 지도자,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월드 리더 트럼프’의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핵심인 비핵화 합의도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지향점에 맞춰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핵심 사안에서 한두 가지를 크게 양보받고 이를 내세우는 식이다. 굳이 구체적인 부분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성공적인 정상회담으로 포장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뮬러 특검이 숨통을 조여오는 가운데 국내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에도 성공적 북·미 정상회담은 좋은 카드다.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세계 최고의 협상가라고 생각한다. 김정은과도 문 대통령보다 더 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원래는 북·미 정상회담을 G7 정상회의 이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정상회의에 가서 박수를 받는 구상도 했다”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싱가포르로 출발하기 직전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이 진정성이 있는지 아닌지 아는 데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질문에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1분 안에 난 알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의 저서 『협상의 기술』에도 1단계는 ‘상대방 교란 및 진심 떠보기’다.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시작되는 시간은 싱가포르 현지시간 오전 9시다. 통상 정상회담을 하기에는 이르다고 여겨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미국 시간으로 바꿔보면 상황이 다르다. 미 동부시간으로 오후 9시는 시청자들이 TV 앞에 앉는 프라임 타임이다. 세계 여러 지도자가 당한 악명 높은 악수를 김정은에게는 어떻게 할지, 처음 만났을 때 표정과 회담 뒤 표정은 어떻게 관리할지 하나하나가 리얼리티 쇼의 한 장면처럼 정교하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 속에서 연출되고 있을 터다. 첫 대면 직후에는 웃지 않고 강한 이미지를 연출할 가능성도 있다. 그가 스스로 제시한 협상의 기술 2단계가 ‘상대방 기선 제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연출은 핵심 의제인 비핵화에서 성과가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양측은 회담 직전까지 기싸움을 이어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최소한 김정은이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완전한 비핵화’에 더해 ‘+∝’를 약속할 필요가 있다. 핵 폐기의 시한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가 종료되는 2020년이 그가 염두에 둔 시한이다.

 또 후속회담 날짜를 확정해 기정사실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번 6·12회담에서 명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2차 회담에서 더 큰 성공을 내기 위한 전초전으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 [연합뉴스]

 이란의 핵능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임의사찰 권한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이란 핵합의를 걷어찬 그로서는 그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결과를 들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그런만큼 현재로선 상황이 쉽지 만은 않다. 성 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가 이끄는 미측 실무협상 대표단은 판문점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의제를 조율했지만, 정상회담 결과물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못박는 데는 합의하지 못한 채 협의를 마무리했다. 핵무기와 핵물질의 조기반출 역시 마찬가지다.

 실무선에서 끝내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김정은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상대방을 강하게 압박하며 판을 깰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협상의 기술 3단계다. 그가 싱가포르로 출발하기 직전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이 진지하지 않다고 느껴지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 그는 북한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이번이 단 한 번의 기회”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미 ‘서한 취소’ 카드를 한 번 썼지만, 협상장을 박차고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와 함께 종전 문제를 북·미 정상회담의 두 축으로 끌고 가는 것 역시 성공적 정상회담을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70년 동안 지속된 전쟁을 끝낸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고, 이는 곧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북한에게 체제 안전 보장을 약속한다는 의미로 주는 선제적 보상인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줄 보증수표도 될 수 있다.
 싱가포르=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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