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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성장의 그늘 뛰다가 처진 사람 돌봐야 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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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 수립 후 40년, 특히 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 속도는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이 보여준 절대 빈곤은 거의 해소됐고 여름철이면 전국이 바캉스 열기에 들뜰 만큼 어느 정도 위락에도 눈길을 돌릴만한 여유를 갖게 끔도 됐다.
특별한 날이라야 맛보던 쇠고기·돼지고기도 이젠 밥상머리에 올라있는 일이 드물지 않고, 마시고 배탈이나 나기 십상이던 우유는 많은 가정에서 일상 음료가 됐다.
식생활의 개선은 체격의 변화로도 나타나 F세의 남자를 기준 할 때 최근 20여 년 간 키는 약 6cm, 몸무게는 6∼7kg이 늘었다.
전력 단속에서 한때 사회적 신분의 징표까지 됐던 이른바「특선」은 전기가 남아도는 요즘에는 상상키도 어려운 얘기가 됐고 그렇게 놓기 힘들던 전화는 가입자 수가 1천 만 명에 육박하고 도로는 국산 자동차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결과로 자주 들먹여지는 이 같은 생활의 변화 뒤에 덮여진 구석도 많다.
주당 근로시간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해 세계 제일의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1인당 주거공간이 늘었다고는 하나 주택 보급률은 갈수록 떨어져 내 집 마련의 꿈은 더욱 멀어지고있다.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는 나라에서 하루 8시간 근무로는 월 10만원을 채울 수 없는 근로자들이 생존하고 있고 산업안전과 환경보전에 대한 무관심으로 산업 재해와 공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공공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은 태부족이면서 향락 산업은 온갖 형태로 번창일로다.
지난해 6월의 민주화 대 투쟁 이후 정치 민주화와 함께 각층에서 다양한 경제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동안 경제성장의 결과로 국민 생할 수준이 절대적 수준에서 한 단계 올라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분배적 정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상대적 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 또한 인정치 않을 수 없다.
항상 제기되는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 문제라든지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 지역간의 불균형 등은 성장 과정에서 더욱 심화됐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자본의 집중은 일반 법칙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경제에서 자본의 집중은 그 정도가 훨씬 강하며 더욱이 그 축적이 대체로 정경유착이라 표현되는 과정에 의해 상당부분 이뤄졌다는 점에서 부정적 시각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력의 집중은 규모의 경제화나 기술개발, 이를 통해 어차피 구조적으로 굳어진 대외 의존적 경제체제 하에서 유일한 탈출구인 대가 경쟁력을 강화시키는데는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무차별적인 사업 확대로 중소기업의 영역을 잠식하거나 생산설비에 대한 투자는 게을리 하면서 부동산 투자에나 열을 올리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재고돼야 마땅하다.
경제력 집중은 어떤 의미에서는 집중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 집중의 과정이 분명하게 공정한 게임규칙에 의해 이뤄졌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정부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갖고있는 각종 인·허가 따위의 제한, 개선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한 여신집중, 결국은 반대급부로 국민의 또 다른 부담이 될 각종 준조세 등 숱한 관권의 개입이 축소되고서야 이 같은 집중과정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부채경감 대책이다, 농축산물 수입 개방압력이다 해서 문제가 되고있는 농촌 문제도 성장의 그늘에 가리워 져 온 문제다 70년대는 수출확대라는 목표를 위해 수출 경쟁력의 유일한 기반이다시피 했던 저임금 유지의 수단으로 쌀 값 상승이 억제돼왔고 80년대 들어선 안정추구의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비교우위론 마저 들먹여가며 수매가 동결 등의 극단적 방법까지 써가며 쌀값을 묶어왔다.
산업 구조의 변화로 농촌 사회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농업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추세가 진전됐고 이는 농민층의 집단적 의사표시와 관철을 더욱 어렵게 했다.
관 주도의 협동 조합도 이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 전시효과만을 따진 주택개량 사업이나 80년대 들어서는 대표적 실정으로 지적되는 복합 영농으로 인한 소 값 파동 등으로 농가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늘었고 작년부터 몇 차례에 겹친 부채 경감 대책이나 지원대책이 나와도 부채문제 해결은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지역간의 불균형 또한 성장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진 문제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저마다 서해안 개발을 들고 나왔듯이 영·호남간의 산업 발전에는 심한 불균형이 생긴 게 사실이다. 지난해 여름 전국이 노사분규에 휘말렸을 때 호남 쪽이 비교적 조용했던 것은 사실 그럴만한 공단이나 큰 공장이 없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층별 소득 붐≠의 수준을 보면 지니 계수의 변화에 별다른 개선이 발견되지 않는다.
상위 20%계층과 하위 40% 계층의 소득 점유율을 보면 85년에 각각 43·7%, 17·7%로 80년 (45.4%, 16·1%) 에 비해서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70년(41·6%, 19·6%)에 비해서는 상당히 악화된 것이다.
더욱이 요즘 부동산·주식 등의 투자에 의해 있는 사람이 돈벌 기회는 더욱 많아지는 반면 임금 소득자의 벌이는 뻔한 것이어서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산업간·지역간·계층간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에 앞으로는 경제 정책의 주안점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
절대 빈곤에서의 탈피를 외해 앞만 보고 뛰어왔다 해도 이제는 그 과정에서 누가 처졌는지, 그를 어떻게 이끌어 함께 가야할지를 생각해야할 때다.

<박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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