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북·미 정상회담 청신호 … 디테일의 ‘악마’는 경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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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3일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을 면담한 후 18년 만의 일이다.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갖가지 제재를 받아온 김영철의 트럼프 면담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친서가 담긴 대형 봉투를 받고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김영철 일행과 90분 넘게 대화한 뒤 일일이 악수하며 배웅하는 등 특급의전을 베풀었다. 면담 뒤 “준비했던 신규 제재 수백 건을 시행하지 않고 최대한의 압박이란 말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유화적 언급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12일 예정대로 열릴 가능성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트럼프, 김영철 환대하며 제재도 보류 #협상 촉진하되 ‘CVID 비핵화’ 관철해야

그러나 디테일로 들어가면 낙관만 하기 어려운 정황들이 포착된다. 우선 트럼프 본인이 회담의 최종 성사 가능성에 대해 아직 말을 아끼고 있다. “12일에 무엇인가에 서명하진 않을 것이고, 두 번 세 번 (더) 회담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회담을 ‘과정’이라고 한 것도 비핵화 담판이 길어질 가능성을 열어 둔 표현으로 보인다. 같은 시점에 김정은도 평양을 찾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에게 “우리는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나 단계적으로 풀려 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북·미가 회담의 핵심 쟁점인 ‘일괄 타결’과 ‘단계적, 동시적 조치’를 놓고 아직 완전한 타협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발언들이다.

회담까지 열흘도 남지 않았다. 양측이 타협을 이뤄내 회담을 성사시키려면 서로 진정성을 갖고 고도로 집중된 조율을 해야 한다. 북한은 CVID에 입각한 비핵화와 핵무기 반출, 미국은 구속력 있는 북한 체제 보장을 각각 약속하는 것이 최상이다. 북한이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에 착수한다면 미국은 과도기적 보상으로 법적 부담이 덜한 종전선언에 응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긴밀한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북·미 간 타협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할 필요가 있다. 다만 회담 성사도 중요하지만 북·미가 가시적 성과에 집착해 ‘CVID 비핵화’에서 이탈해 성급하게 타협할 가능성은 없는지 경계의 고삐 역시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한때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할 만큼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어떻게든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점이다. ‘일괄 타결’ 원칙을 유지하되 실제 비핵화 과정에선 ‘단계적 조치’를 어느 정도 가미할 생각을 내비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마당에 북한 노동신문은 우리 군의 환태평양훈련(림팩) 참가와 8월 실시될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을 “판문점 선언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중단을 요구했다. 북한의 이런 어깃장은 비핵화 진정성만 의심받게 만들 뿐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처럼 습관적인 억지로 큰일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