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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의세상담론] 이준익·김기봉, 영화와 역사를 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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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기봉 교수(왼쪽)와 이준익 감독(가운데)이 권영빈 중앙일보 발행인(오른쪽)과 함께 '역사와 영화의 만남'을 주제로 나눈 세상담론은 영화에서 출발해 역사와 철학·정치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최정동 기자

사회:권영빈=오늘 세상담론은 '역사와 놀아 보자'는 취지로 마련했다. 이 감독은 '황산벌' '왕의 남자'(이하'왕남') 두 영화의 성공 비결을 뭐라고 자평하는가. 김 교수는 역사와 영화의 중매쟁이를 자청하고 팩션(팩트+픽션) 시대를 열겠다고 했는데, 이 감독의 영화를 어떻게 보았나.

이준익=역사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예전의 사극은 계몽적인 위인전 성격이 강했다. 나는 새로운 눈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열린 텍스트로서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 가공 방법이 기존에 강요된 시각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김기봉=권영빈 발행인이 한 칼럼에서 '과거가 햇볕을 쬐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고 쓴 적이 있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 명명백백하게 하지 않으면 신화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나는 좀 다르게 표현해 '승자는 역사를 쓰고, 패자는 소설을 쓴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그것은 주류의 반쪽 역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사실, 역사영화는 허구'라는 이분법을 극복하자는 것이 팩션이다.

권='황산벌'과 '왕남'의 공통된 키워드는 비주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다. 주류의 역사에 대한 불신과 빈정거림이 깔려 있다.

이=정확한 지적이다. 나 자신이 비주류로 성장했다. 고도산업화 시대 과도한 경쟁 체제에서 자란 동시대인들이 다 그렇다. 소수 주류로 편승한 성공 사례가 집중 조명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열패감이 우리 사회에 잠재돼 있다. '황산벌'의 거시기나 '왕남'의 광대는 관객들이 감정이입하기 쉬운 인물이다. 관객들보다 대체로 더 어려운 처지이기 때문이다. 비주류의 삶이 주류 못지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유토피아다.

김=광대는 더 잃을 게 없으면서, 풍자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의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다. '왕남'의 줄타기 광대 장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외줄타기다, 한판 붙어 보자, 크게 놀아 보자, 라고. 비주류 정신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시원한 한풀이를 하며 희망까지 맛본다.

이='황산벌'이 지극히 로컬한 얘기였다면 '왕남'은 동서양 문화를 뒤섞었다. '왕남'의 광대는 셰익스피어의 광대보다 진일보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냄으로써 응징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대면한다. 나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비주류를 보며 관객은 위안과 대리만족을 얻는다.

권='황산벌'은 현실 정치의 동서 갈등을 삼국시대에 비유해 재조명했다는 점이 탁월했다. 역사가 이상의 상상력이다. '왕남'도 비주류 출신인 현 정권에 대한 비유의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그게 목표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모든 역사 속에서 주류로 부상하는 세력은 본래 비주류다. 굳이 현재의 정권을 대입하지 않아도 김유신.연개소문에서 박정희.김영삼.김대중이 처음에는 다 일종의 비주류였다. 그렇게 역사는 돌고 돈다.

김='왕남'에서 연산군은 참 재미있는 캐릭터다. 권력을 쥔 주류인데, 비주류라는 자의식이 강하다. 그 갈등을 광대를 통해 해결한다. 모성애에 대한 결핍 콤플렉스를 공길을 통해 풀려 하고, 비주류의 자의식을 광대놀음이라는 정치 쇼로 풀려 한다. 연산에게 공길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공길은 연산에게 어머니를 대신하는 대리자궁인 동시에 궁궐 밖에서 온 민초, 즉 대중이다. 정치는 여론을 반영할 뿐 아니라 그 여론을 자신의 권력 유지 도구로 쓰려고 한다. 연산은 공길을 그런 대중으로 선택했는데, 공길은 또 다른 대중인 장생에게로 떠난다. 계속해서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점이 대중의 속성이고 위대함이다. 예측대로 되면 이미 대중이 아니다. 나는 그런 대중을 믿는다. 대중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오만이다.

권=중심과 주변,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권력 이동이 급격한 시대다. 현 정권은 권위주의 정부가 아닌 것을 보여주려고 하면서 탈권력화가 많이 됐는데, 좋은 의미의 권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김 교수의 저서에 '매트릭스'라는 적절한 표현이 나온다. 시스템 자체가 권력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시대에서 1대1 퍼스널 커뮤니케이션 시대로 변하는 것을 예로 들면, 매스 미디어 입장에선 권력의 와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땐 새 권력의 등장이다. 양질의 권위마저 무산돼 버린 시대라고 한탄하는 것은 매스 미디어 자본의 시각이다. 새로운 권력을 양성화시키고 양질화시키는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권=역사적 진실.사실.현실 이 삼자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역사가.작가.감독은 물론이고 기자.수사관도 크게 보면 사실의 규명과 해석을 동시에 해야 하는 비슷한 역할이다. 팩션과 팩트의 한계는 어디인가. 개인적으로 역사가나 기자까지 팩션의 세계로 가면 문제라고 본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 위령제에서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있는 그대로 밝혀야 한다"고 했는데, 이 '있는 그대로'가 쉽지 않다.

김=어려운 문제다. 일례로 '왕남'에서 연산과 공길의 관계가 사실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많은 관객이 동성애 코드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그런 시각은 서구적인 것이고, 남사당패에서 여성 역할을 남성이 한 것이 우리 문화의 실제 사실'이라고 밝혔다. 역사책에 안 나오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이런 얘기를 전통 속에서 복원하면서 결과적으로 탈근대적인 성(性)정체성에 접근했다. 공길이 장생과 연산 중 누구를 사랑했는지 영화 속 표현은 애매하다. 그런데 과거엔 애매모호하면 나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애매모호는 의미가 풍부하다는 뜻으로 변하고 있다. 영화는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놀이를 통해 한번 즐겨 보라고 하는 것 같다.

이=맞다. 공길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흑백논리에 강하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20세기 한국사회도 흑백논리가 강했다. 21세기형 개인주의의 모호성을 지닌 인물이 공길이다. 공길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한테 잘할 수밖에 없다. 탈의도적이다. 이상한 회색분자로 취급받던 개인주의의 모호성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모호성은 이제 비겁함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관점이 젊은 관객에게 설득력을 발휘한 것 같다.

권=이 감독은 이제 영화계의 주류 아닌가.

이=그렇게 나누는 것이 주류적 사고다(웃음). 결과적으로 그렇다.

권=주류이면서 비주류처럼 행동하면 사회 통합 대신 양극화를 부추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왕과 도적, 성공자와 실패자의 열전이 두루 등장한다. 여기서 보듯, 모든 역사서를 주류의 역사라고 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역사학자 칼 베커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 역사가와 달리 직업적 역사가에게는 사실 확인의 과학적 엄밀함과 공정성이 요구된다. 직업 역사가와 예술가의 안목이 합쳐질 때 새로운 역사 인식의 상상력이 나오는 게 아닐까.

김='역사가=생산자, 대중=소비자'라는 분업 때문에 역사가 재미 없어졌다. 역사는 결국 자기가 세상과 인간과 과거와 소통하는 것이다. 이런 소통을 어떻게 되찾아 줄까, 전문화의 성을 허물고 딱딱한 역사지식을 말랑말랑하게 유통시킬 수 있을까, 이게 직업으로서 내가 할 역할이다. '왕남' 속에는 감독이 영화 속에 펼쳐 놓은 애매한 빈 공간이 많다. '왕남 폐인'을 자처하는 관객들은 그 빈 공간을 저마다의 해석으로 채워 넣는다. 앨빈 토플러의 표현을 빌면 '생산적 소비자'다.

권=소비자에 영합할 위험은 없는가. 역사가가 좀 더 재미있게, 혹은 현실 정치에 부합되게 역사를 쓰려는 순간 '풀과 가위'로 재단하는 역사가 될 수 있다. 이런 영역은 예술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왕남'의 마당놀이를 보며 관객들은 대사를 못 들을 정도로 많이 웃는다. 그런데 실제 산대놀이나 봉산탈춤 현장을 가서 보면 지루해 한다. 왜냐, 그저 계승만이 최고라 하기 때문에 발전이 없어서다. 팩트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이 문화에는 치명적이다.

권=2003년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가 미국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그 배경을 두고 온갖 해석이 꼬리를 문 적이 있다. 그런데 중앙일보 기자가 이전에 북한에서 찍어 놓은 이 사람의 묘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시나리오가 픽션으로 끝이 났다. 팩트 없는 픽션은 픽션일 뿐이다. 이것을 잘 융합하는 것이 역사와 영화의 중매가 아닌가.

김=맞다. E H 카가 말한 대로 사실 없는 해석은 공허하고, 해석 없는 사실은 맹목적이다. 사실과 허구의 문제는 1과 2 사이다. 1과 2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 픽션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는 무수한 소수점 숫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유한하지만 의미는 무한하다. 이 의미의 무한성을 열어 놓는 것이 팩션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역사는 잘 어울린다.

이=시나리오와 닮았다. 시나리오란 결국 장면과 장면의 연결인데, 여기에는 시간.공간.사상의 비약이 있다. 1과 2는 팩트지만 1에서 2로 가는 픽션의 다양한 가능성이 바로 문화다.

진행.정리=배영대.이후남 기자 <balance@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김기봉 교수는

1959년생. 경기대 사학과 교수.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포스트모던 역사 서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를 펴냈다. '황산벌'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역사영화가 역사책 위주의 기존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스스로를 역사가보다는 역사비평가로 소개한다.

이준익 감독은

1959년생. 세종대 회화과를 다니다 포스터 그리는 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달마야 놀자'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등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외화도 다수 수입.배급했다. 연출은 '키드캅'(93년)에 이어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황산벌'(2003년)로 성공을 거뒀다. '왕의 남자'는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 한국영화 최고흥행 기록을 세우고 계속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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