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정상회담 개최 싱가포르로 기운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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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는 싱가포르가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사실상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력 후보지로 함께 거론돼 온 판문점을 제외하면서 이 같은 분석은 힘을 받고 있다.

"오래전 낙점, 신변 우려 북측 요구로 발표 미뤄" #인프라 우수한 중립국, 역사적 회담 중재 경험도

트럼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각료회의를 주재하며 후보 개최지 중 하나였던 비무장지대(DMZ) 판문점에 대해 “거기는 아닐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시기와 회담 장소를 정했다. 사흘 안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싱가포르’ 유력…“북 요구로 발표만 미뤄” 분석도

 이에 따라 외신들은 잇따라 싱가포르 개최 가능성을 보도하고 있다. CNN은 회담 추진 계획을 잘 아는 두 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미 정부 관리들이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란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싱가포르가 가장 유력한(likeliest) 장소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워싱턴 외교가 안팎에선 미국 측이 희망했던 싱가포르가 회담 장소로 오래전 낙점됐고, 북측의 강한 요구 때문에 장소와 시점 발표를 미루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북미회담 계획에 정통한 워싱턴 소식통은 “이미 싱가포르로 (회담 장소가) 내정된 상황이었지만, 신변 안전 등을 우려한 북측이 원하는 대로 공식 발표를 늦추고 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회담 장소와 시점 등 특급 사안이 서둘러 노출될 경우 북한이 테러 등 대내외적 돌발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경호를 위해 시간이 필요한 북한으로선 최고 지도자의 동선 공개를 최대한 미루는 게 필요했고, 이것이 세계의 주목도를 끌어올려 극적인 시점에 발표하려는 미국 측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강하게 판문점을 권유하고 나서자 트럼프는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제스처’를 취했다는 해석이 있다. 싱가포르를 1안으로 가진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 주며 시간 끌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연합뉴스]

 개인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백악관 참모진에서 강하게 만류한 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미 한 번 회담을 거친 곳이라 흥행성이 떨어지는 데다 중재국인 한국이 오히려 더 부각될 우려가 크단 이유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정부 안팎에서 판문점에서의 종전 선언 방안이 거론되면서 앞서나가는 데 대한 미국 측의 거부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ㆍ중 관계에 밝은 소식통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더 부각되는 모양새라 미국에서는 다소 부담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라며 “판문점에서 열리면 종전선언 논의가 남ㆍ북ㆍ미 간에 되는 것이지만 싱가포르에서 열리면 남ㆍ북ㆍ미ㆍ중으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국이 적극 참여할 길을 열어주자는 차원에서 미국이 싱가포르를 더 선호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중립국에 보안ㆍ경호ㆍ언론 관련 인프라 우수

미 실무진에서 싱가포르를 최적의 장소로 밀어붙이는 데는 중립국인 데다 경호와 언론 접근성 등 인프라 측면에서 뛰어난 조건을 갖췄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싱가포르. [로이터=연합뉴스]

싱가포르. [로이터=연합뉴스]

블룸버그통신은 “싱가포르는 두 지도자에게 모두 중립적 지역(neutral turf)”이라며 이미 “싱가포르는 주목할 만한 외교 행사를 진행한 역사가 있다”고 전했다. 앞서 2015년 11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 간 사상 첫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바 있다.

2008년에는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감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회동해 북한 핵시설 검증협약을 둘러싼 막판 조율을 거쳤었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싱가포르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 해군 지원뿐 아니라 테러나 지역 안보 문제 등에서 미국과 적극 협력하고 있다”며 “아세안 국가 가운데도 미-중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국가가 바로 싱가포르”라고 설명했다.

싱가포르는 북한 입장에서도 친숙한 곳이다. 미국 대사관뿐 아니라 북한 대사관도 있고, 북 외교관이나 고위 관료가 개인적 외유나 건강검진을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도 싱가포르를 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은 싱가포르가 독재국가인데도 경제적으로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느냐며 일종의 모델처럼 꼽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전용기인 ‘참매 1호’가 중간 급유할 필요가 없단 점도 이점으로 꼽힌다. 평양과 싱가포르 간 거리는 약 5000㎞인데 참매 1호의 최대 비행거리는 1만㎞다. 비행기로 6~7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용기 참매 1호. [노동신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용기 참매 1호. [노동신문]

 미국이 경호와 치안, 미디어 접근성 측면에서 취약하단 이유로 꺼리는 몽골과 달리 인프라가 탄탄한 곳이란 판단도 있다.

싱가포르 매체인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싱가포르는 엄격한(robust) 보안을 필요로 하고 수백 개의 미디어를 동반하는 정상회담을 치를 다양한 장소를 갖고 있다”고 했다.

유안 그레이엄 로위국제정책연구소 국제안보연구부장도 “싱가포르는 탁월한 보안을 제공한다”며 “필요한 준비를 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 짧은 미국 대통령에게는 특히 중요한 요소”라고 짚었다.

싱가포르로 확정될 경우 구체적인 회담장이 어디일지에 대해서도 몇 가지 관측이 나온다.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 [샹그릴라 호텔 홈페이지 캡처]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 [샹그릴라 호텔 홈페이지 캡처]

 일차적으로 거론되는 곳은 시 주석과 마잉주 총통의 만났던 샹그릴라 호텔이다. 해마다 각국 국방장관급이 참석하는 안보ㆍ군사 분야의 대형 국제회의인 ‘샹그릴라 대화’가 열리는 데다 경호, 보안 여건, 언론취재 환경 등을 골고루 갖췄다는 평가다.

중심부에 위치하지만, 번화가인 오차드 로드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경호에 유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화교계 자본이 운용하는 호텔 규모가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큰손 후원자 중 한명인 셸던 아델스 샌즈 그룹 회장이 소유한 마리나베이선즈 호텔도 주목된다. 이 호텔은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해안의 신개발지역이자 관광지인 마리나베이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다. 경영주 아델슨은 트럼프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아델슨은 트럼프의 측근일 뿐 아니라 트럼프에게 중동 정책 결정 관련 조언을 해온 인물”이라고 전했다.

다만 북측이 이 호텔에서의 회담에 동의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일반 투숙객의 출입 통제 등 문제가 있는 호텔보다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경호시설에서 개최될 가능성도 있다.

싱가포르는 1975년 남과 북이 동시에 수교한 국가다. 싱가포르가 지난해 11월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기 위해 북한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하기 전까지 북한과의 교역 규모가 일곱 번째로 컸다. 북한 사람들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 외화벌이의 장소가 됐고, 북한의 무역ㆍ선박 회사도 여럿 진출해있다.

싱가포르=전수진 기자, 서울=박유미ㆍ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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