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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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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드디어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했소." 누구도 떠올리기 꺼렸던 빨치산의 기억. 이병주는 소설 '지리산'을 통해 그 아픈 역사를 건져 올렸다. '태백산맥'이나 '남부군' 같은 소설도 여기에 젖줄을 대고 있다. 돌아보면, 이병주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도 없다. 절반은 굴곡진 삶의 이력으로 인해, 절반은 당대에 얻은 명성에 가려 진지한 평론조차 없었다.

회색분자-. 격동기마다 수난을 끌어안은 그에게 붙은 주홍글씨다. 경남 하동의 만석꾼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인공(人共) 치하에서 연극동맹에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 이 부역의 경험은 인생 1막을 헝클어뜨렸다. 신문사 주필 때는 '통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글로 2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그의 인생 2막은 마흔넷에 늦깎이 소설로 등단하며 열렸다. 잘나가는 대중작가로, 5공 때는 전두환 정권을 옹호하는 묘한 행보를 보였다.

이병주는 당대에 이름을 얻은 작가다. 기사 딸린 폴크스바겐을 굴렸다. 시인 김수영의 마지막을 목격한 것도 그였다. 둘은 도쿄 유학파 동갑내기다. 1968년 6월 16일, 궁핍한 김수영이 번역료를 가불하러 출판사에 들렀다 그와 어울렸다. 대취한 김수영은 술자리 중간에 일어섰다. 자신의 차를 타고 가라 붙잡는 이병주를 한사코 뿌리쳤다. 서로 '노선'이 달라서였을까. 비틀거리며 사라지던 김수영을 버스가 덮쳤다.

'글쟁이' 이병주는 엄청나게 글을 써댔다. "한이 많아 글을 쓴다. 많이 쓰고 어떤 것도 쓸 수 있어야 한다." 한 달에 원고지 1000장, 모두 10만 장의 작품을 남겼다. 소설의 절반은 역사소설이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 그는 역사의 그물이 챙기지 못한 이름 없는 인물들의 아픈 사연을 소설로 풀어냈다. 사설가(史說家)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그러나 노년은 초라했다. 좌파는 '변절자'로 몰았고, 우파는 과거를 들먹이며 외면했다. 순수나 참여, 그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책갈피 속에 묻혔던 이병주가 다시 햇볕 속으로 나왔다. 타계 14년 만이다. 그의 기념사업회에는 왼쪽에서 리영희.임헌영, 오른쪽에서 이문열까지 두루 모였다. '냉전시대의 자유인'이라는 근사한 호칭과 함께, 그의 고향에선 떠들썩한 문학제가 열렸다. 고혼을 위한 위령제에 이념의 잣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보수와 진보가 함께한 사진부터 반갑고 보기 좋다. 우리 사회가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는 징조일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