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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르」동관에 명화관람객 줄이어|명작의 단골무대 네프스키 대로는 지금도 번화가로 꼽는 아베크코TM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러시아시인 「푸슈킨」은 레닌그라드를 「유럽의 창」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41개의 섬을 5백90여개의 다리로 연결한 인구5백만명의 이도시는 1712년「피터」대제가 「성페테르스부르크」라고 명명한 이래 「레닌」이 모스크바로 천도하기까지 2세기동안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다.
이곳을 돌아보고 받은 인상은 역시 구체제와 신체제의 절묘한 대조와 조화였다. 물색과 베이지색이 주조인 정교한 건물들 탓인지 레닌그라드는 모스크바보다 분위기가 밝았고 자유분방한 것 같았다. 역시 이미도는 유럽과 가장 가까운 소련의 창구였다.
「리타」여인은 기자를 네바강변쿠투조프로의 여름공원으로 안내했다. 북쪽 끝에 「피터」대제가 지었다는 하궁이 있고, 그 옆에 나란히 2개의 다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나는 차르가 차를, 또하나는 코피를 마신집이었다. 하궁은 1710년부터 4년동안 건설한 2층짜리베이지색 건물로 가장 오래된건축물이라 한다. 그 주변에서 시민들은 옛 귀족이 남겨준 유물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름공원 남쪽 마르스 광장에 4개의 적기가 나부끼는 혁명기념물이 있다. 이곳은 혁명기간에 시민들의 토론장이었고 2월혁명때 차르군에 의해 학살당한 1백80명의 시민·학생·노동자들이 묻힌 공동묘지다. 많은 시민들이 꽃을 바치는 이묘지에는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국민들은 이곳에서 폭군에 대항해 처음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루나차르스키」의 비문이 새겨진 묘석이 있다.

<소최대의 관광명소>
다시 네바강변을 따라 궁정로를 남으로 드라이브, 그 유명한 동궁앞에 도착했다. 차르는 당대의 이탈리아 건축가 「라스트레리」에게 설계를 명령, 1754년부터 33년동안에 완공시켰다. 동궁은 제정러시아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상징하는 전형적인 러시아 바로크형 건축물이다. 흰색 대리석 기둥과 물색 벽이 한층 더 고풍을 풍기는 3층짜리 건물은 당시 2백50만루블의 예산과 2천여명의 학자및 기술자, 그리고 3천여명의 법사들이 불철주야 공사한 결과 차르를 감탄하게 한 황거였다.
그러나 이곳은 혁명후 파리의 루브르미술관및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비견되는 허미타지미술관이 되었다. 오늘날 이 미술관 정문 앞에는 전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있으며 이제 소련이 최대의 관광명물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지금 2백70여만점에 달하는 거의 모든 나라의 명작들을 보유하고 있다. 「캐서린」여제가 1764년 독일화상 「고츠콤스키」로부터 「루벤스」등 네덜란드 작가들의 그림을사들인 것이 컬렉션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후 그림 수집이 계속돼 루브르미술관이 자랑하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맞먹는 명작들인「레으나르도·다·빈치」의 『꽂을 든 마돈나』, 「라파엘」의 『성가족』, 「템브란트」 의 『신성가족』, 「피카소」의 『압생트주를 마시는 女人』, 「마티스」의 『화가가족의초상』, 「르누아르」의 『여배우 사마리의 초상』등을 포함하는 최고의 명화들을 총망라하게 되었다.
이 세계적인 문화재들은 1천54개나 되는 동궁의 각방에 차르 일족의 감상용으로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혁명후 볼셰비키정부는 「스트로가노프」「슈바로프」등 귀족들의 컬렉션까지 국유화, 이곳에 합친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보물들은 소련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미술애호가들에게 공개되어 레닌그라드의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러시아혁명의 현장>
이 미술관 뒤편 넓은 광장 (약 6만평방m) 이 「아이젠스타인」감독이 만든 영화 『10월』에 등장하는 궁장광장이다. 이 영화는 시민·노동자들의 시위대가 성난 파도처럼 동궁을향해 전진하는 것을 차르의 군대가 기관총을 무차별 발사, 저지하는 극적인 장면을 재현했다. 이것이 1905년 1월9일 1천여명이 죽고 2천여명이 부상한 「피의 일요일」이며 또한 러시아혁명의 발단이기도했다.
그 12년후 동궁을 포위했던 적위대·수병·노동자들이 순양함 오로라호의 공격신호에 따라 일제히 동궁을 공격해 들어가는 장면으로 이 영화는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기자가 걷고 있는 광장이 바로 러시아 혁명의 현장이었다. 「리타」는 이광장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몇번이나 울먹였고 알렉산더탑 앞에 왔을 때는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차량통행이 전면 금지된 이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알렉산더탑은 차르가 「나폴레옹」의 침공을 분쇄한 러시아군의 위대함을 기념하기 위해 역설적이지만 프랑스의 건축가 「몽페랑」을 초청해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 47.5m인 이 탑은 1834년 완공되었으며 그 꼭대기에 평화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등에 진 천사상을 올려 세워놓았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는 달리 이 광장에는 사람이 많지않았다. 그 이유를 동궁과 마주보는 4층짜리 베이지색 구러시아군 참모본부를 지나 네프스키대로에 도착한 다음에야 알수있었다. 13세기 스웨덴의 침략을 네바강에서 격퇴시킨 전설적인 영웅이「알렉산더·네프스키」며 「아이젠스타인」이 그의 일생을 영화화한 바 있다.
네프스키대로에는 인파가 인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백야』의 주인공 「나」를 비롯,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고골리」의 『네프스키대로』의 주인공들이 자주 거닐었던 곳이다.
또한 러시아혁명의 진상을 세계에 알린 미국의 신문기자 「존·리드」가 동분서주했던 유서깊은 큰길로 「예부터 처녀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번씩 산보하지 않으면 병나는 곳」이 바로 네프스키대로다.
네바강변에 가까운 해군생 건물의 금빛 첨탑에서부터 네프스키수도원까지 4.5km에 달하는 이큰길은 원래 제정러시아의 금융 중심가였다. 혁명후 신도없는 성당들과 백화점·음식점·극장등이 줄지어 들어선 가장 화려한 거리다.
13번지 비엔나 식당건물에는 1893년10월 「차이코프스키」가 살다 죽은 아파트가 있는가하면, 1906년 「레닌」이 법사들을 모아 혁명을 모의한 비밀 집회장도 있다. 17번지에는「고골리」가 『타라스 불바』등 걸작을 쓴 아파트가 있고 21번지에는 상공회의소가 있다.
그 다음에 높이 13m의 원기둥 96개로 떠받친 카잔성당이 웅장하게 서있다. 성당앞 정원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의자에앉아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네프스키역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예술광장이 있다. 여기는 북쪽에 러시아미술관, 서쪽에 마리극장, 동쪽에 소련민속박물관, 남쪽에 레닌그라드교향악단홀이 있고 광장 가운데「푸슈킨」동상이 서있는, 문자그대로 예술의 중심지다.
특히 교향악단 건물은 혁명후 최대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오랫동안 살면서 많은 명곡들을 창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원래 러시아 귀족 클럽이 들어 있었던 이 콘서트홀에서「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6번 『비창』을 처음 지휘해 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그래서 혁명전 이곳에는 무도회와 축제가 끊임없이 열렸고, 유럽의 음악가들인 「베를리오즌 「바그너」「요한·슈트라우스」「리스트」등과 러시아의「안톤·루빈슈타인」「글린카」「림스키-코르사코프」등의 대화의 광장이 되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 산실>
1941년 여름부터 9백일간 나치군이 포위·공격했을 때「쇼스타코비치」는 지원병으로 이 건물을 방위하며 교향곡7번『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그는 포탄이 지붕에서 터질 때마다 진화작업에 참가하면서 6개월만에 이를 완성, 여기서 초연함으로써 레닌그라드를 나치로부터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한다.
이 곡은 2차대전기간중 모스크바·런던·뉴욕에서 연주되었다. 이것이 그를 세계적인 작곡가로 올려세울 만큼 명성을 떨치게 했으며 또한 음악팬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때 『파시즘은 인류문명의 종말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싸워서 인류를 구해야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을 남겼다.
지하철 네프스키역 주변에는 많은 무명 예술가들이 몰려나와 예술을 팔고 있었다. 18세기 건물인 고스티니 드보르 백화점앞에는 20여명의 화가들이 각각 수십점와 그림을 건물벽에 걸어놓고 손님을 끌고 있었다.
그 맞은편 길가에는 미래의 음악가들이 기타와 바이얼린을 연주하며 동냥하고 있었다. 또많은 초상화가들이 한장에 10루블씩 받고 관광객들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특히 눈을 끈 것은 거리 곳곳마다 정치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리타」의 설명에따르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및 데모크라치자차(민주화)가 토론의 주제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같은 예술상인들과 정치토론이 「고르바초프」등장 이후 나타난 새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풍경들은 「사회주의 혁명의요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색 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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