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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지곤 못 살아…지위·실력 비슷한 사람끼리 더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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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포뮬러원 자동차 경기에서 발생한 차량 충돌사고는 경쟁자 간 벌어지는 증오와 갈등이 주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중앙포토]

포뮬러원 자동차 경기에서 발생한 차량 충돌사고는 경쟁자 간 벌어지는 증오와 갈등이 주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중앙포토]

대표적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원(F1)에서 종종 발생하는 차량 충돌 사고의 원인은 뭘까. 제한된 트랙 안에서 촌각을 다투는 경쟁을 하다 우연히 사고가 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KAIST팀, F1 사고 연구결과 발표 #45년간 355명의 506회 충돌 분석 #“라이벌간 증오·갈등이 주요 원인” #노사처럼 정체성 판이할 때보다 #친구 사이에서 갈등 자주 일어나

하지만 아니었다. 경쟁자 간에 벌어지는 증오나 갈등이 주된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또 극심한 갈등이 일어나는 이런 원리는 자동차 경주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생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이 비슷한 사이일수록 폭력적이고, 파국에 가까운 갈등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의 이원재 교수(사회학·소셜컴퓨팅 전공) 연구팀은 이런 사실을 45년간의 포뮬러원 자동차 경주에서 발생한 사고 데이터를 통해 밝혀냈다고 19일 발표했다. 연구팀은 또한 이런 갈등은 사람들 간 나이가 비슷하고 실력이 우수할수록 깊어진다고 결론지었다. 소위 “내가 딴 놈에겐 몰라도 이놈한테 지고는 못 산다”는 심리가 사회적 갈등과 폭력의 주원인이라는 분석이다.

그래픽에서 점은 포뮬러원 선수들. 선의 길이는 선수 간 관계를 나타낸다. 사회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충돌이 더 자주 났다는 의미다. [그래픽= KAIST]

그래픽에서 점은 포뮬러원 선수들. 선의 길이는 선수 간 관계를 나타낸다. 사회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충돌이 더 자주 났다는 의미다. [그래픽= KAIST]

연구팀은 포뮬러원 등 스포츠 경기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독일 데이터베이스 기업 모터스포츠 아카이브를 통해 지난 45년간 이뤄진 포뮬러 원 경기에 출전했던 355명 사이에 발생한 총 506회의 충돌사고 데이터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포뮬러 원의 선수별·시즌별 기록을 선수들끼리의 우열과 천적 관계 등을 비교할 수 있도록 모으고, 이런 행동 데이터를 통해 선수들의 사회적 정체성 유사도를 수치화했다. 그 결과 선수 간 프로파일 유사도가 10% 증가할 때마다 충돌사고를 일으킬 확률이 18% 높아졌다.

이원재 교수는 “서로 간의 승패가 비슷해 경쟁 관계에서 우위가 구분이 안 되면 본인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고 느낀다”며 “다른 사람에게는 지더라도 나와 비슷한 상대에게는 반드시 이겨서 이 모호한 정체성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얘기할 때는 ‘경영자 대 노동자’ ‘권력자 대 시민’처럼 권력과 정체성이 다른 집단 사이의 갈등을 떠올린다는 점에서 KAIST의 분석 결과는 이례적이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갈등으로 범위를 좁히면, 오히려 사회적 위치가 비슷한 경우 더 자주 발생한다는 게 이번 연구 분석의 결과다. 단일한 갈등과 폭력 사건만을 보면 개별적인 이유와 원인이 있지만, 데이터를 모아서 전체 평균을 내보면 극심한 폭력과 갈등은 행위자들이 서로 비슷한 위치이거나 친구일 경우 더 자주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회 현상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왜 포뮬러 원이 그 대상이 됐을까. 포뮬러 원 경기에서 발생하는 충돌사고는 고의적인 것(collision)과 우연한 사고(accident)를 구분해 놓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사회 현상 분석 대상으로 적절했다는 것이 KAIST 측 설명이다. 이 교수는 “회사나 조직에서의 경쟁 관계나 우위는 데이터를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스포츠는 선수의 성과가 굉장히 객관적으로 기록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경쟁이 일상화된 시장이나 조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게 KAIST 측 설명이다. 조직 내에서 극한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구조적 조건을 밝혀냄으로써, 갈등으로 인한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와 체계의 설계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게 연구팀의 얘기다.

개인의 폭력적 행동과 사회를 연결하는 이론적 시도는 그간 드물었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는 폭력적인 행위에 개인적 원한이나 욕망이 아닌 사회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밝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3월 26일자에 게재됐다. 국내 대학의 사회학자가 순수 사회학 연구로 PNAS에 논문을 게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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