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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밀사 '워싱턴 안주인' 안나 셰놀트 95세로 숨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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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안나 셰놀트[하버드대 슐레진저 도서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안나 셰놀트[하버드대 슐레진저 도서관]

미국 워싱턴에서 대만·중국의 로비스트로 활동한 안나 셰놀트(중국명 천샹메이·陳香梅)가 지난달 30일 숨졌다. 95세. 워싱턴포스트(WP) 등 미 언론은 그가 워싱턴 DC 포토맥 강변의 워터게이트 단지 내 자택 펜트하우스 아파트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셰놀트의 딸 신시아는 지난해 12월 발생한 뇌졸중의 합병증이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다.

중국 항일전쟁 영웅 클레어 셰놀트 부인 #1985년 덩샤오핑 밀사로 전두환 만나 #대만·중국 오가며 50년 로비스트 활동 #박동선 워싱턴 정관계 데뷔시킨 인물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까지 포토맥 강변의 자택에서 정부 각료·의원·외교사절 등을 모아 디너파티를 열곤 했다. ‘셰놀트 부인’ ‘드레곤 레이디’로 불리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막후실세이자 워싱턴의 안주인으로 군림했다.

안나 셰놀트 젊은 시절[하버드대 슐레진저 도서관]

안나 셰놀트 젊은 시절[하버드대 슐레진저 도서관]

셰놀트는 중국 베이징에서 1923년 6자매의 둘째 딸 천샹메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옥스포드대 출신으로 당시 베이징대 법대 교수, 국민당 정부 외교관을 지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중앙통신 기자로 일하면서 30년 연상인 클레어셰놀트 미 공군소장과 만나 1947년 결혼했다. 셰놀트 장군은 중국에서 현지 의용군 공군부대 ‘플라잉 타이거스’를 지휘한 항일투쟁의 영웅이었고 2차대전 때도 중국 주둔 미 14 공군 사령관이었다.

셰놀트가 남편이 설립한 민항 화물 항공사 플라잉 타이거스 부회장 신분으로 본격적으로 아시아계 로비스트 활동을 시작한 건 남편이 사망한 58년 워싱턴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남편 친구이자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정책 입안자, 저명한 로비스트였던 토머스 코코란의 도움이 컸다.

남편 클레어 셰놀트 장군과 안나 셰놀트

남편 클레어 셰놀트 장군과 안나 셰놀트

본토를 탈출한 중국 난민을 지원하는 등 장제스 총통의 대만 정부를 지원한 게 시작이었다. 60~70년대 미 공화당의 최대 정치자금 후원자로서 대만 국민당의 워싱턴 정계 자금줄로 통했다.
미·중 수교 이후인 1981년부터는 중국 본토를 오가며 최고 실권자이던 덩샤오핑의 밀사 역할도 했다. 중국 전인대 상임위 부위원장, 공산당 중앙정치국원을 지낸 랴오청즈(廖承志)가 4촌이었기 때문이다.

셰놀트는 젊은 조지타운대 졸업생 박동선을 워싱턴 정관계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 박동선이 당시 워싱턴 정·관계 로비 무대로 사용했던 고급 사교장 ‘조지타운 클럽’ 설립할 때도 도움을 줬다. 하지만 1976년 코리아게이트 땐 직접 연루되진 않았다.

이어 한·중 수교 전인 85년 3월 흑산도 앞바다에 표류한 중국 어뢰정을 송환한 뒤 덩샤오핑 당시 군사위 주석 특사로 방한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셰놀트는 그 자리에서 직접 ‘수교’란 용어를 쓰진 않았지만 “중국의 장래와 관련해 큰 도움을 받았다”는 덩샤오핑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이미 덩 주석은 외교부에 “이제 남한과 수교를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지침을 준 상태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한 안나 셰놀트[하버드대 슐레진저 도서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한 안나 셰놀트[하버드대 슐레진저 도서관]

셰놀트의 로비 오점은 1968년 리처드 닉슨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밀사로 월남 정부와 접촉해 베트남전 종전을 위한 파리 평화협상에 불참시킨 일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후 연방수사국 도청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반역행위”라고 분노했지만, 닉슨이 당선되어 형사상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결국 닉슨과 셰놀트의 비밀공작으로 베트남전은 수십만 명 사망자를 추가로 내며 1975년 종전됐다.

셰놀트는 이후 닉슨에게 대사직과 같은 주요 공직 임명을 기대했다. 그러나 닉슨은 상원 인준 과정에서 자신의 공작이 누설될까 봐 지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생 자신의 활동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안주인(Hostess)’과 같은 별명으로만 대접받은 게 그의 한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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