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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밥상만 받아도 젓가락으로 "풍장"|이리농악 김병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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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농악이란 말은 일제 이후 50년 남짓 사용돼온 용어다. 옛 문헌에는 농악이란 낱말이 없다. 오히려 순수한 우리말로「풍장친다」「굿친다」「매구친다」「두레논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풍장은 꽹과리·징·북같은 풍물 (민속악기) 로 울리는 풍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굿과 매구라는 말속에는 고래의 제의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안자산은「맷굿」이 곧 제악이라고 풀이했다. 두레는 고대의 부락공동체 조직에 대한 지칭이다. 농사를 비롯한 여러가지 작업을 공동으로 상부상조하고 때로는 싸움에도 임하는 공제협조체제면서 하나의 도의단체 구실을 했다. 말하자면 그러한 모임의 협화와 활력에 필요한 음악이었다는 뜻이 된다.
풍장치는 용어를 보면 군악의 요소와 군악의 요소가 다분히 포함돼 있다. 문굿·당산굿·마당굿·정지굿·성주풀이·굿거리등이 그러하며 굿판에서 쓰이는 악기가 거의 동시에 이용됨을 보게 된다. 반면에 길군악이니 진법풀이등은 무예의용어고 영기를 비치한다든가 전립과 더그레같은 복색은 군사를 연상케 한다.

<종교의식과도 밀접>
또다른 측면은 걸립패다. 사찰에서 불사에 필요한 재원이나 그밖의 비용을 거둬들이기 위하여 화주승이 풍장의잽이들을 거느리고 여러 마을에서 한 마당씩 벌인다든가, 집집마다 방문하며 시주하기를 권하는 일이다. 이같은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종종 볼수 있다 (정사룡의『호음잡고』, 정다산의『목민심서』등). 그것은 본시 농촌의 오락행사였고 뒷날 사당패의 걸궁 행각에까지 미치는 것이리라.
어쨌든 농악의 시원을 소급해보면 우리나라 음악의 원초적인 형태, 무용이나 연극 혹은 종교의식과도 밀접한 것임을 부인할수 없다. 다만 그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딴 요소가 곁들여지고 혹은 지역적 특성이 선명히 발전되기도 했다.
『우도굿은 정읍 김제가 본 고장인디. 근년 서울서 한다하는 치배 (풍장의 잽이) 가 다 그 바닥에서 나온 사람 빼고 더있읍디여.』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이리농악 보존회장인 설장구 김형순씨 (55) 도 전북 정읍에서 잔뼈가 굵었다. 해방후 전국의 내노라하는 잽이들이 정읍에 모여들어 농악대를 조직해 포장치고 돈받아 순회공연할 즈음이다. 부안태생인 김씨는 주산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서당에 꿇어앉는 것이 못마당해 정읍으로 뛰었다. 그저 따라다니는 것으로 재미있었다.
『어려서부터 밥상 놓고 장단치다가 혼나기도 많이 했는디요. 삽자루와 다듬이 방망이로 쇠채 만든다고 톱질하다가 혼쭐도 났고요. 그래 대농의 외동아들인디 끼가 있다고 하랍깝디여? 16살때부터 그랬는디 나갔다간 잡혀오길 여러번 하다가 그만 장가나 들라 하대요. 아버지가 철저히 만류했고 지금도 서당골 우리 김씨마을 가면 언짢아 하시는 어른들이 계싱께요.』
19세에 이리로 내보내 철도국에 취직시켜 주었다. 거기서는 도저히 풍장칠 겨를이 없어 16일만에 안나가버렸다. 양조강에 취직하니 비로소 가능했다. 그때 술 좋아하는 목수할아버지가 계셨다. 틈틈이 전내기술을 퍼다드리고 장구통하나 깎아달라고 졸랐다. 통오동나무를 옥낫으로 깎아 만들어준 장구통이 바로 김씨가 35년간 애지중지 사용해오는 그물건이다. 말하자면 고락을 같이 해온 분신같은 귀물이다.
삐라 조각만한 포스터를 만들어 시내 곳곳에 붙여 동호인을 모았다. 동란후 농악에 대한 열기가 다시 일 때다. 이수남·김갑동·이시열등 선배들과 매일 밤 두드려 댔다. 난장굿을 벌일 때엔 으례 그에게 장구를 가르쳐 준 이동원씨도 불러 앞장세웠다.

<대농의 외동아들>
호남지방 중에서도 우도농악이란 전라도 서부 지역을 가리킨다. 옥구·부안·김제·정읍·고창을 거쳐 장성·영광·무안·강진에 이르는 광역에 분포된 풍장 가락이요 보기좋은 너름새 (연극적인 몸짓) 다. 일찍부터 부안의 김바우와 김제의 김도삼, 정읍의 이봉문, 장성의 최화집 같은 큰 잽이들에 의해 붐이 조성됐었다. 이에 비해 좌도농악은 금산·무주·전주·남원·구례·순천·화순 것을 가리키는데 역시 우도농악에 미치지 못한다. 경상도는 더 부실한 편.
대체로 북한으로 올라갈수록 농악은 약한 편이고 강원도와 경기도 농악은 무동과 잡새(뒤따르는 잡희자) 에 특징이 있지만 주로 농사짓는 형용이 많다. 남도농악은 벅구(소고)놀이중심으로 재주부리는 모양이 볼만한데, 요즘에는 점차 우도농악을 배워 놀이 폭을 넓혀가는 경향이다.
설장구 하면 역시 호남 우도농악이다. 남도 농악이 대체로 북이 센 편이지만 우도농악만은 유독 설장구가 한몫을 톡톡히 한다. 물론 소고는 10명이고 20명이고 얼마든지 늘릴수 있지만 장구에는 한계가 있다. 과다하면 채가 안맞기 일쑤여서 4∼5명이 한팀으로 적정하다.
김씨는 그런 시대의 풍조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 보안면 수랑 뜰에서 이발소를 하는 김대근할아버지가 어쩌다 장구를 잡으면 펄펄나는 걸 보았다. 어린 눈에도 넋을 잃을만큼 명수다왔다. 가락에 따라 하발·중발·상발의 발놀림이 가볍고 궁굴채와 열채 (장구의 양편 채) 의 놀림이 보드랍고 한없이 흥겨웠다.『상쇠와 부쇠 자리는 논 한 필지보다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설장구 (수장구) 와 부장구도 마찬가진디, 한 사람 뒤에 서고 앞에 서는게 명예와 대우면에서 딴판인거지요. 어디서나 비등한 라이벌이 있고 텃세도 있는 것이지만 기능과 연조를 무시하고 잘못 정했다간 살인나는 겁니다. 그게 돈이 문제 아닌지라….』

<춤사위 다채로와>
김씨는 20대까지 부장구를 맡았다. 부장구는 바로 윗자리 설장구의 지시에 좇아야함은 물론 평소에 모든 수발까지 다 들어줘야하는 것이 이 작은 조직내의 엄격한 룰이다. 김씨는 30대가 되자 설장구 자리에 올랐다. 그만큼 노력의 성과가 빨리 돋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타고난 재량이 남달랐음도 부인할수 없다. 풍장 중에서도 특히 장구는 가장 음악·무용·연극의 종합예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도농악에 있어 1장단은 징한번 치는 것에 준한다. 아무래도 호남 살풀이답게 느리고 연한데 흥겨움이 넘친다. 장구는 1채, 2채, 3채, 5채가락만 가지고 실연하는데, 다른 고장에 비교안될 정도로 변주가 심해 춤사위가 다채롭고 거의 반복없이 진행된다.
풍물이 대개 원시악기에 속하는데 비하면 장구는 훨씬 후대에 편입됐으리라 추정된다.
불교의 주악비천에는 장구의 형태가 이미 통일신라 유물에서 발견되는 것이지만 정작 당악기로서의 장구가 우리나라 향악에 편성되기는 고려시대다. 그러니까 장구가 오늘날과 같은 풍장에 끼게 되기까지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됐을 것 같다. 북 자체는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원시적인 것이요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선 필수적인 무패. 바꿔 말하면 한국의 원시신앙에서도 북의 비중은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꽹과리 (쇠) 와 징에 아리송한 의문이 남아 있다. 오늘날 그들 금속악기는 구리와 석 합금의 방짜로만 제작되며 반드시 벌건 놋쇠덩이를 두드려 펴서 담금질을 하게 돼 있다. 그래야만 음색 좋고 진동이 큰 타악기로서의 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도경』에 이미 정과 바라에 관한 기록이 보이므로 방짜 타악기의 발달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징과 꽹과리를 원시악기로 간주할때 방짜 이전에는 어떤 제품이었을까. 정작 음악사 내지 악기사에서도 이 부문에 관한 언급이 없거니와 유물조차 이렇다 할것이 없다. 무속에 현존하는 명도 (놋쇠거울유) 가 청동기시대 이래의 견습으로 지피는데, 과연 징의 오래된 형태를 금구 (금고) 로 대신해도 좋을 것인가.

<"대 끊길까 걱정">
농악의 원형이 굿이 됐든 두레가 됐든 그 악기 편성과 발전 과정을 상고하는데는 몇가지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런 과제를 합리적으로 풀이할수 있다면 한국 고유의 고대 악기에 관한 해명은 자연히 실마리를 찾게될 것이다.
이리농악의 경우 잽이의 서열은 다음과 같다. 상쇠·설장구·수북·수징·수벅구가 1급이라면 부쇠·부장구·부북·부징·부벅구는 2급이 된다. 그밖의 치배는 일괄해 3급인 셈. 1급은 바로 각 파트의 지휘권을 가지며 수입에 대해서도 우선 배당받게 된다.
최대 구성인원은 1946년 처음으로 농악경연대회가 열렸을때 광주 농악이 1백36명의 대거 인원을 기록했다. 1백명 미만은 예사며 이리농악의 경우도 현재 상비군으로 확보돼있는 치배가 42명이다. 물론 최소단위로 꽹과리·징·북이 각각 1명씩만 있어도 풍장치기는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에 뒤따르는 관중이 합류해 잡색으로 어울리는 까닭에 그 3명이라는 숫자는 단지 커다란 무리의 지휘부를 지칭할 따름이다.
『내 집 2층은 작지만 아예 단원한테 내놓았읍디여. 그중 5명은 가족같이 함께 살림하죠. 밥만 먹으면 풍장치는게 일인께 적은 수입갖고는 운영해내기가 벅차구만요.』
이제는 보존회가 가족처럼, 기업처럼 운영돼야 하리라는 것이 김씨의 지론이요 소신이다. 소수의 정예단원만이라도 생계가 되도록 풍물의 기본을 다 익히게하고, 또 여러곳의 파편지도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리를 우도농악의 발판이요, 기틀로 만들겠다는 꿈에 한껏 부풀어 있다.
글 이종석
(중앙일보호암갤러리관장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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