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북핵에서 멀어져 가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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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핵에 관한 조지 W 부시 정부의 선택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6자회담 틀 안에서 대화로 해결하는 것. 둘째는 강도 높은 압박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게 하는 것. 셋째는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고 핵물질의 비확산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것.

미국은 참을 수 없이 과도한 반대급부와 인내심이 요구되는, 대화를 통한 핵 문제 해결에 흥미를 잃고 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이것을 핵에 대한 미국의 집중력 저하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북한을 압박하는 채찍요법은 노무현 정부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현이 어렵다. 결국 미국에 남은 선택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고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와 관련 물질의 확산을 저지하는 셋째의 정책이다. 대북 협상파가 비확산파에 밀린 것이다.

비확산파의 정책은 미국에 대한 북한 핵무기의 위협론이 과장됐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북한이 몇 개의 핵무기를 가져도 그것을 미국 본토까지 날려 보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갖지 않는 한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없고, 북한의 경제사정과 기술수준을 보면 그런 미사일을 가질 날은 요원하다는 판단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동북아 미사일방어망(MD)의 명분도 강화한다. 북한 핵이 미국에 주는 유일한 위협은 수출과 확산을 통해서다. 따라서 비확산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논리다.

부시 정부의 공식 정책은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이다. 지난해 11월 노무현.부시의 경주 회담에서도 북핵의 평화적인 해결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은 6자회담 참가국들이 어렵사리 합의한 9.19 공동성명의 이행방안도 내놓지 않고 위폐와 인권에만 매달린다. 미국은 마카오은행 DBA로 하여금 북한과의 거래를 끊게 했다. 그러자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과 아시아 은행들이 줄줄이 북한에 등을 돌렸다. 해외에 돈을 보낼 수도, 해외에서 돈을 들여올 수도 없게 된 북한은 외교부 미주국장을 미국에 보내 타협을 시도했지만 미국한테 거절당했다.

9.19 베이징 공동성명을 미국이 나머지 5개국한테 말려든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은 위폐 문제를 가지고 북한뿐 아니라 6자회담의 나머지 5개국에 후련한 복수를 했다고 기뻐할 것이다. 미국이 위폐와 인권 문제를 대북정책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정교한 외교적 고려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재무부와 법무부의 입김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크게 작용하는 불행한 사태와 한국의 낭패를 의미한다. 국무부 안에서 강경파와 힘겨운 노선투쟁을 벌이던 대북 협상파는 재무부와 법무부가 강경파에 가세하는 서슬에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제이 레프코위츠 북한인권특사의 정열적인 활동까지 강경파에 힘을 보탠다.

정리하면 미국은 서서히 북핵에서 멀어지면서 위폐와 인권처럼 북한이 확실히 잘못하고 있고, 그래서 국제사회가 양해하고 한국 정부가 불평도 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북한을 압박하는 노선을 밟는다. 북한은 금융제재를 안 풀면 6자회담에 안 나가겠다고 버틴다. 눈치 없는 악수다. 북한이 6자회담에 나와 성실하고 유연한 자세를 보여야 미국이 북한의 해외 계좌 중에서 깨끗한 것은 풀어 주라는 한국의 권고를 고려라도 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수용하면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써 오던 유일한 지렛대를 잃는다.

미국도 위폐로 거둔 눈앞의 작은 성취에 만족할 때가 아니다. 중국을 보라. 중국의 대북 경제 진출은 북한을 중국의 동북 제4성(省)으로라도 만들 기세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휴전선까지 미치면 미국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몇 십 년 걸려도 회복하지 못할 전략적 손실을 볼 것이다. 언젠가 북한에 일어날 변괴(變怪)를 염두에 두고 미국의 영향력을 압록강까지 확대한다는 미국의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손을 내밀고, 미국은 북한이 내미는 손을 잡아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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