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사단 북·미·중·일 숨가쁜 외교, 정작 외교부는 안 보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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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 둘째)이 12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코리아트랙 대표단과 이야기하고 있다. 강 장관은 15~17일 미국을 방문해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을 만난다. [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 둘째)이 12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코리아트랙 대표단과 이야기하고 있다. 강 장관은 15~17일 미국을 방문해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을 만난다. [연합뉴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주무부처인 외교부의 존재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대미특사단이 미국으로 출발할 때 일행엔 외교부 실무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에 앞선 대북 특사단(5~6일)에 외교부가 배제된 건 남북 관계의 특수성 때문이었다고 치더라도, 최대 우방국인 미국에 가는 특사단에 외교부 관계자가 완전히 빠진 건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당시 정의용 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있을 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싱가포르·베트남(7~10일)을 돌았다. 현 정부의 ‘외교 다변화’와 ‘신남방 정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지만 핵심 현안과는 동떨어진 일정이었다. 특사단이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도 조윤제 주미대사만 배석했을 뿐 외교부 본부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방미단에 외교부 빠진 건 이례적 #‘김정은 회담 제안’도 뒤늦게 안 듯 #외교부 주류였던 북미·북핵 라인 #인사 때 한직으로 밀린 것도 원인 #강 장관, 틸러슨 만나러 뒷북 방미 #“4강 관계 복잡, 충분한 역할 해야”

강 장관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한 사실도 전달받지 못한 채 싱가포르로 출국했을 가능성도 있다. 청와대가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 내용을 아는 사람은 대북 특사단 5명과 문재인 대통령뿐”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12일 특사단의 방중·방일에도 외교부는 소외됐다. 뒤늦게 강경화 장관은 15~17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과 회담을 열 예정이지만 특사단의 활동에 따른 후속 회담 성격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정의용 실장이 외교부 출신이니 외교부가 특사단에 참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 실장은 외시 5회로 2004년에 외교부를 떠났기 때문에 현 외교부 간부들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다. 국가안보실과 외교부의 업무 방식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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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평창 겨울올림픽 국면에서도 외교부의 위상은 미미했다. 특히 지난달 13~14일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 등을 연쇄 면담한 것을 두고 외교부 내에서도 뒷말이 많았다. 당시 천 차관은 대사들에게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방한 성과를 설명했는데 원래 주한 4강 대사의 카운터파트는 외교부 1차관이다. 주무부처를 건너뛰고 통일부가 직접 외교 활동을 벌인 셈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아주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다음에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논의하고, 이를 토대로 외교부가 상대국에 설명하는 것이 맞다”며 “국제 관계의 특성을 고려치 않고, 남북 관계에만 중심을 둔 접근을 하면 상대국의 지지를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외교부 패싱’은 과거 노무현 정부 때와 비슷하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송민순 외교부 장관과 윤병세 외교안보수석 등은 회담 추진 과정에서 배제됐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전직 당국자는 “외교부는 기본적으로 친미동맹파밖에 없어 외교부가 끼면 북한과는 될 일도 안 된다는 게 노무현 정부의 인식이었다”고 전했다.

현 정부에서도 외교부의 기존 주류였던 북미·북핵 라인이 인사에서 대거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옷을 벗었다. 특히 지난 정부에서 외교안보 사안에 깊이 관여했던 인사들이 ‘적폐’로 몰리는 가운데, 여권 인사들이 줄줄이 ‘낙하산 대사’로 내려오는 일까지 벌어져 조직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얘기가 많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한·미 간의 입장 조율이 극히 중요한 시점이어서 외교부가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는 “미국은 다원화된 사회여서 의회 조직이 크고, 정부 내에서도 한 부처만 봐서는 안 된다”며 “외교부는 외교부대로, 국방부는 국방부대로 층층이 역할을 하면서 트럼프까지 올라가야 향후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부터 미국 내에서도 기존 외교안보 조직의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외교부도 정책적인 아이디어와 전략들을 보여주며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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