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바둑 삼국지’로 불리는 농심신라면배(이하 농심배)는 한국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2000년부터 2013년까지 총 14번 대회에서 한국은 11차례 우승하는 등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형세가 급반전된 건 2014년부터다. 세계 무대에서 급성장한 중국은 2014년부터 4년 내리 우승컵을 가져갔다. 농심배에서 중국의 독주가 이어지는 모양새였다.
커제 9단 꺾고 한국 우승 확정 #한국 5년 만에 농심배 우승 되찾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아 승리” #올해 목표는 세계대회 개인전 우승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은 ‘올해는 꼭 우승컵을 되찾아 오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출발도 좋았다. 한국의 첫 번째 주자인 신민준 7단이 6연승을 달렸다. 그런데 신 7단을 꺾은 중국의 당이페이 9단이 5연승을 기록하며 다시 중국이 상승세를 탔다. 믿었던 국내 랭킹 2위 신진서 8단도 당이페이 9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 한국 대표팀의 맏형 김지석(29) 9단이 출동했다. 김 9단은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 그랜드센트럴 호텔에서 열린 농심배 제12국에서 당이페이 9단을 꺾은 데 이어, 1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농심배 제13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인 커제 9단을 물리치고 한국의 우승을 확정했다. 두 대국 모두 어려웠던 바둑을 강한 집념으로 이겨냈다. 농심배 우승의 일등 공신인 김지석 9단을 6일 서울 마장로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5년 만에 한국이 우승했다. 우승 소감은.
- “예전에 농심배에 출전해 우승했을 때(11·14회)는 내가 일찍 떨어지고 다른 사람 덕분에 한국이 우승했다. 이번에는 내가 마무리를 하게 됐는데 개인전 우승 못지않게 기분이 좋았다.”
- 당이페이에 이어 커제와의 대국이 모두 극적인 바둑이었는데.
- “사실 바둑 내용은 두 판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실수가 잦았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잘한 점인 거 같다. 평소에는 이기고 싶으면 의욕만 앞섰는데 이번에는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믿고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 두 판 중에 더 어려웠던 바둑은.
- “바둑을 두기 전에는 당이페이 9단과의 대국이 더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5연승을 거둔 당이페이 9단의 기세가 좋았기 때문이다. 바둑 내용만 놓고 보면 커제 9단과의 바둑이 역전 가능성이 더 낮았던 어려운 판이었던 거 같다.”
- 커제 9단과의 대국은 역전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비결은.
- “바둑이 불리했지만 좌하귀에 기분 나쁜 모양이 있어서 커제 9단이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실제로 그 부분에서 커제 9단의 실수가 나왔고, 그 바람에 형세가 달라졌다.”
- 이번 승리로 커제 9단과 상대 전적이 4승 2패가 됐다. 커제 9단에게 강한 것 같다.
- “커제 9단이 물론 잘 두긴 하지만 아주 특별한 기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실수하는 것처럼 그도 실수할 수 있다. 지금 커제 9단이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데 실제로는 알려진 만큼 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선수들이 커제 9단과 대국할 때 지레 겁먹지 않았으면 한다.”
- 최근 바둑 공부할 때 관심 있게 보는 부분은 무엇인가.
- “요즘에는 ‘알파고 제로’ ‘알파고 마스터’ 등의 기보를 보고 있다. 알파고의 수법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보를 놓아보면 알파고는 확실히 바둑판을 사람보다 넓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인터넷 바둑도 자주 두나.
- “일 년에 한 번 둘까 말까다. 인터넷 바둑은 패배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잘 두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프로기사들에 비해 실전 경험이 부족한 편이다.”
- 최근 성적이 좋은데 올해 목표는 무엇인가. (올해 김지석 9단의 성적은 15승 1패다.)
- “작년 말부터 농심배가 가장 신경이 쓰였는데 잘 넘긴 거 같다. 단체전인 농심배는 잘했으니까, 이제 세계대회 개인전에 나가서 우승하는 게 목표다.”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한·중·일 대표선수 5명씩 출전해 연승전 방식으로 대결하는 국가대항전. 우승상금 5억원. 한국기원이 주최하고 ㈜농심이 후원한다. 올해 대회까지 한국이 12회, 중국이 6회, 일본이 1회 우승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