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이후 차명계좌도 과징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금융위원회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에 개설된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물리도록 법 개정을 추진한다.

금융위, 실명제법 개정 추진 #탈법 목적 계좌에만 물리기로 #신설조항 소급 적용은 논란 여지 #이건희 차명계좌 자산은 62억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5일 기자간담회를 하고 이러한 내용의 금융실명제 제도개선 추진 방향을 밝혔다. 현행 금융실명법에 따르면 금융자산 가액의 50%를 과징금으로 떼는 벌칙 조항은 실명제 시행일 이전에 개설된 차명계좌만 대상이다. 하지만 국회에서 법이 개정되면 93년 8월 12일 이후에 개설된 차명계좌라고 해도 과징금을 매길 수 있다.

다만 ‘탈법 목적’의 차명계좌에만 과징금 제도를 도입한다. 배우자, 자녀, 동창회 명의 계좌 같은 일반적인 차명계좌는 과징금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 부위원장은 “탈법 목적임이 객관적으로 밝혀져야 과징금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검찰 수사나 국세청 조사, 금감원 검사 등을 통해 비자금 조성이나 조세포탈, 자금세탁 같은 범죄·탈법 목적임이 밝혀진 차명계좌가 대상이다.

금융위는 과징금 산정 기준일을 바꾸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김 부위원장은 “차명임이 드러나는 시점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현행법은 과징금 산정 시점을 ‘긴급명령 시행일 현재의 금융자산 가액’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를 ‘차명임이 드러난 시점의 금융자산 가액’으로 바꾼다는 의미다.

이날 금융감독원은 ‘이건희 차명계좌 확인 태스크포스(TF)’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금융실명제 긴급명령 시행 당일(1993년 8월 12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27개 차명계좌에 있던 자산은 총 61억8000만원으로 집계됐다. 금감원이 지난달 19일부터 지난 2일까지 27개 차명계좌가 개설된 4개 증권사(신한금융투자,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대우, 삼성증권) 본점과 문서보관소, 한국예탁결제원, 코스콤 등을 검사한 결과다. 이번 검사는 실명제 시행일 차명계좌 자산 평가액의 50%를 과징금으로 물려야 한다는 법제처 유권해석에 따라 이뤄졌다. 2008년 삼성 특검이 발견한 이 회장의 1229개 차명계좌 가운데 93년 8월 12일 이전에 개설된 27개 차명계좌가 검사 대상이 됐다.

이번 확인된 이 회장 자산 대부분은 삼성그룹 계열사, 특히 삼성전자 주식이었다. 주가 상승을 고려하면 현재 평가액은 2369억원(지난달 26일 삼성전자 주가 236만9000원)이지만 과징금은 실명제 시행일(당시 주가 3만8600원) 기준으로 부과한다. 김도인 금감원 부원장보는 “현재 27개 차명계좌의 잔액은 거의 없고, (삼성그룹 지배구조 핵심인) 삼성생명 주식은 발견되지 않았다”라며 “삼성증권에 개설된 계좌는 실명제 시행 이후 일정 기간 거래 내역이 없는데 이는 추가 검사로 밝히겠다”고 말했다. 차명재산이 이 금액으로 확정되면 이 회장이 내야 할 과징금은 30억9000만원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원승연 금감원 부원장(TF 단장)은 “이 회장 차명계좌와 관련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과징금 부과 절차가 조속히 진행되도록 국세청과 협력하겠다”라고 말했다.

남은 문제는 2008년에 드러난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 1229개 중 실명제 시행일 이후에 개설된 계좌 1202개다. 이 계좌엔 현행법상 과징금을 부과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나 정치권에서 법 개정을 논의하면서 이 회장 계좌에 소급 적용을 할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부위원장은 “어디까지가 소급이냐, 아니냐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검토해야 한다”라며 “과징금 부과 대상의 기준, 방법에 대해 입법 추진과정에서 제도 개선 취지가 최대한 발휘되도록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라고 말했다.

한애란·이새누리 기자 aeyan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