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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반대나 진영 갈등에 편승해선 보수정치 요원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73호 02면

사설

3·1절 99주년이었던 지난 1일 서울 도심에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보수·친박근혜 성향의 집회 참가자들이 한반도기를 든 진보 성향 참가자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경찰 추산으로 각각 3만7000명, 1500명이었다고 한다.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한 30대 젊은이가 “젊다고 모두 진보 정권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김여정도 모자라 김영철까지 서울 땅을 밟게 하는 게 어딨냐. 잘못된 대북 경제정책으로 결국 피해 보는 층은 우리 같은 청년”이라고 말했다는 보도도 있다.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 이후 밀리기만 했던 보수 진영으로선 오랜만에 기세를 올린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

 ‘광장’은 그러나 정교한 민심 지표가 아니다. 당장 여의도만 봐도 알 수 있다. 6·13 지방선거를 석 달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앞은 출마 후보자들로 문전성시인 데 반해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후보를 찾지 못해 난감해하고 있다. 한국당은 마땅한 서울시장감마저 없다.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마다 “출마는 안 한다”고 손사래를 치는 실정이다. ‘이미 기운 운동장’은 여론조사로도 확인된다. 최근 갤럽 조사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64%, 민주당 지지율이 44%였다. 한국당(13%)과 바른미래당(8%)의 지지도를 합쳐도 민주당의 절반이 안 된다. 이러니 보수 정당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국회에서보다 농성·집회 등을 통해 장외에서 부풀리고 있다.

 정당이 위기의 뿌리라면 신장개업 형태로 새 당을 만들고 새 인물을 충원하면 된다. 하지만 보수 진영의 위기는 그 뿌리가 더 깊고 넓다. 민주주의는 복수의 정치적 비전들이 존재하고 경합하는 조건 위에서 성장한다. 보수든 진보든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고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보수 진영이 과연 그러고 있는가, 실행할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가. 답은 아니다다.

 보수 독과점 체제를 지탱했던 가치들은 그 시효가 이미 다한 지 오래다. 안보 차원에서 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정치 세력은 전통적이고 맹목적인 반공 외에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평창 겨울올림픽 이후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미묘한 국제정세 속에서 문재인 정부를 반대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경제 문제에서도 시장경제질서와 사유재산에 대한 수호를 외칠 뿐 불평등을 완화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법과 질서 존중이란 면에서도 전 대통령과 전전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낯 뜨거움의 연속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위기가 극복되는 건 아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한 올바른 처방과 치열한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추락한 미국 보수 진영이 전열을 재정비해 1980년 공화당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건 1971년 변호사인 루이스 파월의 메모 등에서 비롯된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의 결과였다. 이후 헤리티지 재단,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운동 등 보수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조세삭감·노동신축화·군비증강 등 아이디어가 분출했다.

 1970년대 마거릿 대처 총리의 등장 이전에 영국 보수 진영에선 케인스식 사회민주주의에 맞선 신자유주의 지적 혁명이 있었다.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으로 이어지던 노동당 정부 10여 년을 무너뜨린 건 40대 젊은 보수당 지도자의 ‘현대적이며 따뜻한 보수주의’ 주창이었다.

 미국에서도 티파티 운동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반대했을 뿐 대안이 되지 못했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하고 증오만 하는 티파티에 대한 반발심이 오바마의 연임을 가능케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한국의 보수도 이제 거듭나야 한다. 어떤 가치를 대표하고 무슨 대안을 낼지 모색해야 한다. 맹목적인 진영의 이익이나 대립에 편승하지 말고 비전과 정책으로 무장해야 한다. 진보·보수 대립을 넘어서는 신가치를 제시하면 금상첨화다. 그걸 찾아내고 키워 내는 게 보수 진영, 나아가 대한민국의 담론이 한 차원 도약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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