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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말한 적 없다"··· 진실게임으로 번진 '빙상 위의 불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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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상 불화 논란

19일 열린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경기에서 김보름·박지우 선수 뒤로 노선영 선수가 레이스를 하고 있다. 이날 대표팀은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연합뉴스]

19일 열린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경기에서 김보름·박지우 선수 뒤로 노선영 선수가 레이스를 하고 있다. 이날 대표팀은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연합뉴스]

평창올림픽이 한창인데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대표선수들 사이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노선영, 마지막 바퀴 체력 달려 처져 #제갈성렬 “중간에 두고 밀어줬어야” #감독 “선영이가 맨 뒤 뛰겠다 자청” #노선영 “뒤로 빠지겠다 한 적 없다” #김보름, 노선영 탓한 전날 발언 사과 #“빙상 비리 조사” 30만 명 청와대 청원

김보름(25·강원도청), 박지우(20·한국체대), 노선영(29·콜핑팀)이 호흡을 맞춘 여자 대표팀은 19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팀추월 준준결승에서 3분03초76으로 7위에 그쳤다. 경기 전까지는 4강에 오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날 부진한 기록 탓에 준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팀 내 최고참인 노선영이 김보름·박지우보다 4초가량 늦게 골인한 뒤 후폭풍이 거세다. 일부 네티즌은 “김보름과 박지우가 노선영을 버리고 들어왔다. 이참에 대한빙상경기연맹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한다”며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30만 명 돌파)까지 한 상태다.

결국 대한빙상경기연맹은 20일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초 백철기 대표팀 감독을 비롯해 김보름·박지우·노선영 등 선수 전원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엔 백 감독과 김보름만 나왔다. 백 감독은 “노선영이 감기 몸살이 심해 참석이 어렵다고 했다. 아직 어린 박지우도 덜덜 떨면서 ‘못 가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날 경기에서 김보름과 박지우는 2분59초대에 들어오고 노선영은 4초가량 늦게 골인했다. 박지우와 노선영의 거리 차는 40m가량 됐다. 팀추월은 마지막으로 들어온 선수의 기록이 팀 기록이 된다.

레이스 도중엔 맨 앞에 있는 선수가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맨 앞 선수의 체력 소모가 크다. 그래서 선수들이 교대로 앞에 나서 레이스를 한다. 그러나 노선영은 지난달 24일부터 28일까지 훈련을 하지 못했다. 빙상경기연맹의 행정처리 미숙으로 올림픽 출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뒤 선수촌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나라 선수의 자격이 박탈된 덕분에 막판에 극적으로 출전 기회를 얻었지만 컨디션이 최고는 아니었다.

김보름 선수(왼쪽), 노선영 선수(오른쪽) [연합뉴스]

김보름 선수(왼쪽), 노선영 선수(오른쪽) [연합뉴스]

팀은 노선영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짰다. 박지우가 스타트로 나가 반 바퀴를 돌았고, 이어 노선영(1바퀴)→김보름(1바퀴)→박지우(1바퀴)→노선영(0.5바퀴)→김보름(2바퀴) 순으로 선봉에 섰다. 백철기 감독은 “4강으로 목표를 수정하면서 김보름의 비중을 늘렸다”고 말했다.

김보름이 에이스 역할을 맡은 가운데 마지막 두 바퀴에서 문제가 생겼다. 노선영은 반 바퀴를 선두에서 이끈 뒤 김보름·박지우에 이어 맨 뒤로 빠졌다. 이후 두 바퀴 동안 김보름과 박지우는 속도를 냈고, 노선영은 점점 처졌다. 보통 맨 앞에서 달린 선수는 힘이 빠져 가운데로 들어간다. 가운데 자리에선 숨을 고를 수 있는 데다 처지는 기미가 보이면 마지막 선수가 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선영이 가운데가 아닌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다.

이에 대해 백 감독은 "노선영이 경기 전날 그렇게 하자고 의견을 냈다. 더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서는 노선영이 리드한 이후에도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선영이는 중간에 들어가 속도를 늦추기보다는 가장 뒤에서 가는 게 낫다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포토]상황 설명하는 김보름

[포토]상황 설명하는 김보름

그러나 노선영의 말은 달랐다. 노선영은 이날 기자회견이 끝난 뒤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다른 선수들과 훈련하는 장소도 달랐고,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며 "내가 뒤로 빠지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날 대표팀의 목표 기록은 2분59초대였다. 4위로 준결승에 오른 미국의 기록은 2분59초02였다. 3명의 선수가 이날 2분59초대를 기록했다면 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김보름도 "기록을 의식해 마지막 바퀴 때 힘껏 달렸다”며 "결승선에 와서야 선영 언니가 뒤처졌다는 걸 깨달았다. 앞에서 이끈 사람으로서 뒤 선수를 챙기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기 후 인터뷰 내용에 대해 많은 분이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죄송하다.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보름은 전날 인터뷰에서 실소하며 노선영을 탓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결국 김보름은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갈성렬 SBS 해설위원은 "노선영은 레이스 중반부터 체력이 떨어져 보였다. 기록이 늦더라도 노선영을 중간에 두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달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선영이 뒤처지는 걸 정말 몰랐는지에 대한 해명도 이어졌다. 박지우는 전날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 인터뷰에서 "(김)보름 언니랑 제가 준결승에 진출하려는 마음에 더 잘 타려고 욕심을 냈다. 제가 뒤에서 보름 언니를 밀면 기록이 더 잘 나와서 그렇게 했다. 골인하고 전광판을 봤는데 (선영 언니가) 없어 너무 당황했다. 코치 선생님들이 레이스 도중 (선영 언니와) 많이 떨어져 있으니 살피라고 했는데 첫 올림픽이라 긴장을 많이 해서 인지하지 못했다”고 했다.

백 감독도 "사실 코치존을 벗어나면서까지 간격이 벌어졌다고 소리쳤는데 응원 소리가 커 전달이 안 됐던 것 같다. 전달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빙상인은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은 3명이 같이 붙어 달리기 때문에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떨어져 있었다면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테고 뒤처졌다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19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8강전에서 한국의 노선영이 강호 네덜란드 대표팀을 상대로 힘찬 레이스를 펼친 뒤 고개를 숙인 채 보프 더용 코치의 위로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8강전에서 한국의 노선영이 강호 네덜란드 대표팀을 상대로 힘찬 레이스를 펼친 뒤 고개를 숙인 채 보프 더용 코치의 위로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코칭스태프의 태도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경기 직후 노선영을 위로한 건 네덜란드 출신 보프 더용 코치뿐이었다. 이에 대해 백 감독은 "현장에서 (선영이를) 못 챙긴 부분은 반성하고 있다. 김보름·박지우 등은 미안한 감정 때문에 선영이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해명했다.

김보름 등 팀추월 대표팀 선수들은 21일 오후 7~8위전에 출전한다. 김보름과 박지우 등은 24일 매스스타트에서 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제갈성렬 해설위원은 "아직 남은 경기가 많다. 선수들을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애정을 가지고 격려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릉=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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