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 좋게 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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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모략중상은 세 사람을 죽인다. 바빌로니아 율법서(탈무드)에 나오는 얘기다. 한 사람은 「말하는 사람」, 또 한사람은「그 말을 듣는 사람」, 마지막으로「모략 중상을 당한 사람」 , 이들이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2000년이 넘게 유대인의 정신문화를 지탱해 온 도덕 규준서다. 굳이 낯선 고장의 예화가 아니라도 우리 나라 옛 선비의 시조도 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아마도 겉 희고 속검을 손 너 뿐인가 하노라』(이직, 가곡원류).
남의 말하지 말고 자기나 제대로 다스리라는 충고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담백하지 만은 않다. 지난 4·26총선을 보며 우리 나라 정치풍토에선 언제나 페어 플레이가 벌어질지 절로 한탄이 나왔다. 그나마 유권자들은 옛날 사람들이 아닌데 정치꾼들은 그제나 이제나 매한가지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엊그제 상처한 사람을 보고 실제로 있지도 않은 처제하고 어떤 관계라느니, 『검둥이 아들은 어디에 감추어 두었나』하는 따위의 부단 이 길거리에 나 뒹굴고, 어느 후보는 수녀와 어떤 사이라는 실로 입에 담기도 뭣한 모략을 받은 예도 있었다.
이런 유의 비방과 중상은 비단 선거철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경험하는 일이다. 요즘 신문 사회면엔 이런 얘기도 있었다. 혼인을 거절하는 처녀를 비방하는 삐라를 만들어 그 동네에 뿌린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엔 어디나 비방과 중상모략이 있게 마련이다. 명경 지수처럼 맑고 밝은 사회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든다.
필경은 세상 풍파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정변이 잦고 벼락 출세와 벼락 몰락도 많은 것이 우리 나라다. 벼락부자가 있는가 하면 엊그제까지도 떵떵거리던 부자가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고 자취를 감추는 경우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봤다. 저 사람은 무슨 재주로 친정부지의 출세가도를 줄달음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결국 남의 말하기 좋아하고 중상모략이 시도 때도 없이 횡행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그만한 사회적 상황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회 병폐를 못 본체 내버려 둘 수만은 없다. 요즘 어느 사회단체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남의 말 좋게 합시다』하는 캠페인에 나선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고소도 짓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운동이 한국 청년 회의소와 같은 젊은 세대들에 의해 주도된 것에 반가움을 갖게 된다. 물론 캠페인 한번 했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자각이 사회일 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2300년 전 로마의 시인「클라우디우스」는『남을 헐뜯는 말은 개의 웅변이다』라고 일갈한 일이 있었다. 고귀한 입을 가지고「개의 웅변」을 토로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모욕이 없다. 그야말로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다.
결론은 공자님 말씀으로 대신해야겠다. 『물처럼 스며드는 중상과 피부에 느껴지는 모략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히 총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을 비방하지 않고도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모든 국민이 총명해 질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 주는 민주사회가 이루어지면 국민들은 스스로 총명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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