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LH, "공공부문 후분양제 도입" , 정부는 공공부문 후분양제 의무화 입법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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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체가 제공하는 팸플릿이나 견본 주택만 보고 짓지도 않은 아파트를 수억원씩 먼저 내고 사는 지난 40년 동안의 시장 관행(선분양제)이 막을 내릴까.

후분양제 개정 정부안 단독입수 #공공 먼저 의무화, 민간엔 인센티브 #LH 내부 보고서 “후분양 이미 결정” #"후분양제, 분양가 상승 영향 없어" #찬반 엇갈려 국회 통과는 미지수 #“상품보고 고르고, 분양권 투기 없어져" #"분양가 오르고, 아파트 공급 줄어" #

국토교통부가 아파트를 거의 짓고 난 후 입주자를 모집하는 후분양제를 공공 부문부터 의무화하는 주택법 개정 정부 안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제출한 것으로 6일 확인됐다. 공공 부문에서 먼저 후분양제를 의무화하고 향후 후분양을 하는 민간 사업자에는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는 내용이다.

공공 주택을 공급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도 후분양제 도입을 사실상 확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속도를 내면서 2003년 이후 15년 가까이 끌어온 후분양제 도입이 현실화될지 주목된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후분양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후분양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6일 국회와 국토부에 따르면 국토부 고위 인사가 최근 국회 관계자들을 만나 후분양제 관련 주택법 개정을 위한 정부 안을 제시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정부 안에 따르면 LH와 지방공사 등은 주거종합계획에 따라 주택 공정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한 이후에 분양하도록 의무화했다. 주거종합계획은 정부가 10년마다 수립하는 주택 공급 정책의 큰 그림이다.

국토부는 지난달 31일 올해 업무 계획을 발표하면서 올 상반기 중 2차 주거종합계획 수립에 맞춰 후분양제 로드맵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 안에는 후분양제를 도입하는 민간 건설사를 지원하는 방안도 담겼다. 후분양 사업자에 공공택지를 우선 공급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주택도시기금과 보증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자금력이 약한 중소 건설사가 후분양제로 도태될 수 있다는 시장의 우려를 덜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파트 공정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를 후분양으로 인정할 것이냐는 문제는 향후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할 방침이다.

8일 열리는 국회 국회교통위원회 법안 심사 소위원회에서 후분양제 관련 안건이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8일 열리는 국회 국회교통위원회 법안 심사 소위원회에서 후분양제 관련 안건이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회에는 정동영·윤영일 민주평화당 의원이 각각 발의한 주택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공공·민간 사업자 모두 공정률이 80% 이상일 때 분양을 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다.

정부 안은 이 법안들과 묶어 수정안 형식으로 8일 열리는 국토위 법안 심사 소위위원회에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회 관계자는 “정부가 후분양제 도입을 위한 법률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후분양제 도입 논의가 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공주택을 공급해온 LH는 후분양제 도입을 사실상 결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LH 내부 보고서에는 “공공 부문의 선도적 역할 수행을 위해 이미 후분양제 도입을 결정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하반기 LH 미래전략실(현 미래혁신실)이 작성한 것이다. 박상우 LH 사장은 지난해 10월 열린 국정감사에서 “국토부가 결정하면 당장에라도 후분양제를 시행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건설사의 견본주택을 시민들이 둘러보고 있다.

한 건설사의 견본주택을 시민들이 둘러보고 있다.

LH 보고서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후분양제에 따른 금융 비용 추정치다. LH가 자체적으로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연 1만 가구의 공공 분양주택 아파트를 후분양 할 경우 LH가 미리 조달해야 하는 건설 자금은 약 1조9000억원이다. 이에 따른 금융 이자는 매년 730억원이다. 공사 기간 2년에 공정률 80% 단계에서 분양하는 것으로 가정한 액수다.

 LH 관계자는 “후분양에 따른 이자 비용은 LH의 자금 조달 금리 수준”이라며 “이자 비용이 분양가로 전가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분양가 업무를 담당하는 LH 판매보상기획처 관계자 역시 “분양가 산정 방식이 복잡해 후분양으로 분양가가 얼마나 오를지 예단하기는 힘들다”면서도 “공공 분양주택은 분양가 상한제 적용을 받기 때문에 후분양을 해도 분양가가 크게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LH가 2014년 9월 이후 후분양제 시범사업으로 공급한 전국 5개 단지 5000여 세대를 분석한 결과, 사업비 1조3000억원 대비 분양가 상승률은 0.57%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후분양제로 건설사의 자금 조달 비용이 늘어나 분양가가 급등할 수 있는 시장의 우려와 다른 결과다.

LH가 작성한 후분양제 장단점

LH가 작성한 후분양제 장단점

정부와 일부 정치권이 후분양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1977년 도입돼 40년째 시장 관행으로 자리를 잡은 선분양제를 뒤집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아서다.

후분양제는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도입이 추진됐다. 하지만 건설업계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고 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 일부 공공기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LH 등에서도 선분양과 후분양을 선택할 수 있다. 그동안은 대부분 선분양을 했다. LH는 그동안 총 7000여 세대를 후분양으로 공급했다.

한 대형 건설사 임원은 “지금도 선·후분양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선분양제가 지난 4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건설사·소비자에게 모두 이익을 주는 제도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건설사는 자체 자금 조달 없이도 분양받은 고객으로부터 계약금·중도금을 받아 주택을 지을 수 있었고, 소비자 역시 한꺼번에 목돈을 내야 하는 부담을 덜면서 분양 계약 시점과 입주 지점 간 2~3년 사이에 시세 차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후분양제를 하면 자금력이 약한 건설업체는 아파트를 짓기 어려워 아파트 공급이 줄 수 있다. 중소형 건설업체가 버티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후분양제는 장단점이 확연히 갈린다. 2~3년에 걸쳐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을 치르는 선분양 방식과 달리 후분양을 하면 분양받는 시점과 입주 시점이 짧기 때문에 한꺼번에 목돈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건설사가 자금 조달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해 분양가가 오를 가능성도 있다. 후분양에 부담을 느낀 건설사가 착공에 나서지 않으면서 아파트 공급이 줄고 결국 집값이 더 오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대로, 상품도 안 보고 고가의 아파트를 구매하는 비정상적인 거래가 사라지고, 부실시공이 줄 수 있다는 목소리도 크다. 선분양 때는 아파트에 하자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준공 직전이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파트를 시공한 후에 정확한 공사비가 산출되기 때문에 분양가 역시 합리적으로 정해질 수 있다. 소비자와 건설사 간 정보 비대칭이 해소된다는 것이다.

실수요자뿐 아니라 시세 차익을 노린 투자자까지 분양시장에 뛰어들면서 분양권에 웃돈을 주고 거래하는 투기가 줄고, 아파트 공급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건설사 간에 품질 경쟁이 붙으면서 아파트의 질도 더 좋아질 수 있다.

서순탁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선분양제가 건설사를 위한 제도라면 후분양제는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라며 “비정상적인 분양 제도를 정상화한다는 차원에서도 후분양제 도입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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