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의 도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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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규동씨 농장특혜사건은 결국 검찰이 염보현 전 서울시장을 소환, 수사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해묵은 이씨 농장문제가 꼬리를 물고 세간에 알려지면서 심상치 않은 징후를 보이더니 그것이「신문보도→내사→소환검토」의 예정된 코스를 밟는 것 같다. 얼마전의 새마을코스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며칠 전까지도 보통사람이 범접하기도 어려웠던 서울특별시장의 높은 자리에서 위세를 떨치던 염씨가 형사피의자의 신세로 검찰에 소환되기에 이르는데 대해 많은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을 가질 것이다. 절대권력만 믿고 오로지 위만 쳐다보고 치닫던 한 고위관리의 공직생활 시말에 대한 연민의 정도 없을 수 없다. 또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교훈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 같은 공직자를 믿거라 하고 일 처리를 지켜본 국민들이 느끼는 심정은 더욱 비참한 것 같다. 지사나 특별시장쯤 되면 얼마나 영예스러운 직책인가. 그의 명령 일 하에 수만 명의 공무원이 움직이고 그의 결정과 단안에 따라 수많은 시민들의 생활과 환경의 조건들이 좋게 되고 나쁘게도 되는 막강한 자리다. 국민학교 코흘리개에서부터 고교생에 이르는 숱한 모범생과 우등생들이 그가 내려 주는 상장을 받지 않았는가.
막강한 권한을 쥐고 만인이 우러러보고 존경받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그가 그처럼 부끄럽고 부도덕한 짓을 했을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에 관한 책임있는 보도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을 속속 들추어내고 검찰도 이미 거액의 수뢰혐의까지 포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국에서는 수상과 수도의 시장을 번갈아 맡아 할 정도로 무겁고 영예스러운 자리로 아는 시장의 공직생활이 결국 초췌한 모습으로 끝나야만 하는 악순환이 한심할 따름이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달라지기가 무섭게 재현되는 이 같은 현상은 이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궁극적인 원죄는 물론 권위만능주의, 한사람에게 잘 보이면 영달이 약속되고 한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정치 탓이다. 행정이 절대로 지켜야 할 이념이 민주성과 공익성, 능률성과 법의 지배, 책임과 능력 등 인데 이게 모두 권위주의 정치아래서 무시되거나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절차와 규범은 아예 무시되고 합리성이나 정당성, 합법성이 절대권력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행정의 독선이 줄달음치고 부정과 불법이 성행했지만 견제나 비판도 받지 않았다.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했던 들, 감사나 수사 등 행정의 내부통제기능이라도 제몫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면 한낱 지방기관장이 무소불위의 월권과 부정을 제멋대로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지방의회라도 구성되어 시시콜콜 감시를 했더라도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모름지기 이런 부류의 비리와 부조리는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여러 장치와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가 도덕성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장치와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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