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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야당 공조 없는 개헌 추진은 실패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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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개헌분과위원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개헌분과위원

헌법 개정은 시대적 요구다.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이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정치를 파행으로 내몰고, 경제의 발목을 잡아 국민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을 연기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현행 헌법을 유지해 국민의 고통과 피눈물을 방치하는 셈이다.

대통령·여당 일방적 개헌 추진은 #개헌을 물 건너가게 만드는만큼 #야당이 개헌 협상에 나설 수 있게 #명분과 실리 살려주는 정치 펴야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개헌 문제를 비중 있게 언급했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 맞춰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주권·기본권·지방분권을 위한 개헌을 강조하고 권력구조는 정치권에 맡겼다. 국회 발의를 촉구하지만 어려우면 정부가 발의하겠다고 했다. 개헌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개헌 내용과 시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개헌 정국은 불투명하다.

현대판 국부론이라 불리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한 나라의 번영과 빈곤을 결정하는 근본 원인은 정치제도라고 말했다. 정치제도가 정치와 경제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정치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헌법이다. 헌법은 정치 주체에게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과 같다. 도로와 교통체계가 바뀌었음에도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은 채 운전하면 목적지에 갈 수 없다. 헌법 경제학을 창시한 제임스 뷰캐넌은 정치와 경제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헌법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정치와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헌법을 바꿔야 한다. 정치와 경제가 더 망가지기 전에 잘못된 헌법은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스위스·독일이 거의 매년 개헌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독일은 1949년 이래 60여 차례, 스위스는 1848년 이후 150여 차례나 헌법을 개정했다.

지난해 1월 여야 합의로 구성된 국회 개헌특위는 개헌 시기 논란으로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당시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바른정당은 대선 전 개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지난해 4월 개헌특위가 5당 대선 후보를 초청해 개헌 입장을 물었더니 모두 2018년 6월 지방선거와 동시 개헌을 약속했다.

시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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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해 10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개헌 시기를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겠다고 대선 공약을 깨는 말을 했다. 개헌 정국을 주도해야 할 자유한국당이 개헌 논의에서 도피하려는 모습으로 비친다. 제1야당의 존재감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졸속 개헌은 안 된다고 한다. 230년간 효력을 유지하는 미국 헌법도 4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각 주 대표들은 거의 매일 하루 6~7시간씩 열정적으로 협상하고 타협을 모색했다. 모두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 타협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우리는 헌법을 제정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개정하려는 것이다. 개헌특위는 이미 1년이나 논의했고, 국민 의견도 들었다.

개헌특위는 개헌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의견 일치를 보았다. 권력구조 문제도 발상을 바꾸면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제·이원집정제·의원내각제로 유형을 나눠 한 가지를 선택하려 하니 평행선을 달린다. 어느 나라도 그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식으로 개헌을 논의하지 않는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대통령과 국무총리·국무위원의 선임 방법과 권한 등을 놓고 하나하나 협상을 하다 보면 합의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승자독식의 권력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데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 야당은 권력구조에 관한 개헌안을 제시하는 적극적 자세로 개헌 정국의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정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예술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가능한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지탄을 받아 왔다. 국회 불신이 위험 수위다. 이번 개헌을 성사시켜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로 복원시켜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이 일방적으로 개헌 정국을 주도하려 하면 개헌은 물 건너간다. 야당 당사를 찾아가서라도 야당이 개헌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도록 명분과 실리를 주어야 한다. 개헌이 실패해서 공약을 이행하지 못하면 대통령과 여당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권이 개헌에 실패한다면 국민이 법률과 헌법을 제안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법률과 헌법발안권을 주권자인 국민에게 돌려주는 개헌이라도 해야 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0% 이상이 개헌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 다수의 요구는 주권자의 명령이다. 촛불 사태 이후 국민은 권력자의 선처만 바라는 어제의 국민이 아니다. 국민은 주권을 스스로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하고 찾게 될 것이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개헌분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