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 필름도 포기한 55년 후지맨, 제록스까지 삼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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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필름 홀딩스의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이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본업인 필름 사업을 포기하는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린 고모리 회장은 최근 미국 제록스의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후지필름 홀딩스의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이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본업인 필름 사업을 포기하는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린 고모리 회장은 최근 미국 제록스의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중앙포토]

79세의 최고경영자(CEO)가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다. 후지필름 홀딩스의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회장이다. 112년 전통의 미국 대기업을 인수하기로 했다. 한때 세계 시장을 주름잡으며 ‘복사기의 대명사’로 통했던 제록스다. 후지와 제록스를 합치면 세계 최대의 사무기기 업체가 탄생한다.

후지필름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 #복사기 저물고 컴퓨터 시대 오자 #복사기+프린터 복합기로 시장 대응 #종신고용 관행 깨고 5000명 정리 #노하우 살려 화장품·의약품 진출 #2008년 금융위기 땐 해외 눈 돌려 #“가을 제록스 인수 뒤 또 1만명 감축”

시대에 맞춰 변신에 성공한 회사(후지필름)는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제록스)는 남에게 팔리는 신세가 됐다. 일본 기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회사의 운명을 가른 것은 CEO인 고모리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개혁 의지, 정확한 방향 판단이었다.

올가을 거래가 완료되면 뉴욕 증시 상장기업인 제록스는 이름을 후지제록스로 바꾼다. 후지필름은 6700억엔(약 6조6000억원)에 제록스 지분 50.1%를 확보한다. 제록스 이사회 12명 가운데 과반수인 7명을 후지가 지명한다. 고모리 회장은 새로운 제록스의 회장에 취임한다. 사장 겸 CEO는 제프 제이컵스 현 제록스 CEO가 맡는다.

고모리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개발·생산에서 유통까지 세계적인 규모에서 상승(시너지)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에서 복합기 시장은 이미 성숙했지만 아시아처럼 성장하는 시장도 있다”며 “미국 제록스의 기업가치가 높아져 주주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후지필름 주요 연혁

-1934년 회사 설립
-1962년 후지제록스 합작 설립(지분율 50%)
-2001년 후지제록스 지분 추가 인수(지분율 75%)
-2004년 ‘제2 창사’ 선언, 1차 구조조정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맞아 2차 구조조정
-2018년 미국 제록스 인수 계획 발표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반세기 만에 본가를 역전”이란 제목으로 후지의 제록스 인수 소식을 전했다. 두 회사의 관계는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이었다. 후지와 제록스는 손을 잡고 합작회사를 세웠다.

이듬해인 1963년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고모리가 평사원으로 후지필름에 입사했다. 이후 55년 동안 한 회사에서 운명을 함께했다. 오직 실력으로 버티며 50대에 임원이 됐다. 유럽법인 사장을 맡아 세계 시장을 보는 감각을 키웠다. 60대에 본사 사장, 70대에 회장에 올랐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후지와 제록스는 50대 50의 합작 파트너였지만 초반에 주도권을 쥔 쪽은 제록스였다. 후지제록스는 일본 등 아시아 일부 시장으로 사업권이 제한됐다. 세계 최대인 미국 시장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1990년대를 거치며 상황이 급변했다. 단순한 복사기의 시대는 저물고, 컴퓨터로 문서를 출력하는 프린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금난을 겪던 제록스는 2000년 중국 시장의 사업권을 후지제록스에 넘겼다. 이어 합작회사의 지분 중 절반을 후지에 팔았다. 후지제록스는 후지가 75%, 제록스가 25%의 지분을 보유한 회사가 됐다. 후지제록스는 복사기와 프린터를 결합한 복합기로 시장 변화에 대응했다.

제록스는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후지는 달랐다. 2004년 고모리 사장(당시)은 후지필름 창사 70주년을 맞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선언했다. 본업인 필름 사업을 사실상 포기하는 내용이었다. 대신 필름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고도의 기술력을 활용했다. 화학 분야의 다양한 사업에 적용할 수 있었다. 화장품과 의약품, 의료기기, 액정용 필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종신고용이 ‘상식’이었던 일본에선 파격적으로 5000명의 인력을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진통이 적지 않았다. CEO가 직접 나섰다. 직원들을 만나 회사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죽는 것보다는 수술하는 게 낫다”고 설득했다.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에겐 위로금을 포함해 충분한 퇴직금을 쥐여줬다. 그는 “우리의 구조조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드라이(dry·메마른)’한 구조조정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2008년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고모리 사장(당시)은 다시 구조조정에 나섰다. 핵심 인재를 해외로 파견해 글로벌 시장에 적극 대응했다. 그룹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구조조정의 풍랑 속에서 후지제록스는 그룹의 든든한 현금창출원(캐시카우) 역할을 했다.

이번 회계연도(2017년 4월~2018년 3월) 그룹 전체의 예상 매출액은 2조4600억엔(약 24조원), 매출총이익은 9800억엔(약 9조7000억원)에 달했다. 그룹 매출의 40%가 넘는 1조700억엔(약 10조원)이 후지제록스의 사무기기 부문에서 나온다. 후지제록스는 앞으로 전 세계에서 직원 1만 명을 감축하고, 연구개발과 회사 운영 등을 통합해 비용 17억 달러를 절감할 계획이다.

과거 필름 시장의 경쟁자였던 코닥은 몰락했다. ‘만년 2등’이었던 후지필름의 성공과 대조적이다. 코닥의 실패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코닥은 2012년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2013년 법원 결정으로 기업회생 절차를 시작했다. 최근 암호화폐 ‘코닥원’ 계획을 내놓으며 재기를 노렸지만 암호화폐 발행이 연기됐다는 소식에 주가가 급락했다.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1939년 만주에서 출생. 나가사키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63년 후지필름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다. 입사 32년 만인 1995년 임원 승진과 함께 영업제2본부장을 맡았다. 1996년부터 4년간 후지필름 유럽법인 사장을 지냈다. 2000년 후지필름 사장에 취임했다. 2004년 ‘제2의 창사’를 선언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2007~2008년 NHK 경영위원장을 맡아 공영방송 개혁에도 앞장섰다. 2012년 6월부터 후지필름 홀딩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올가을 미국 제록스 회장에 취임할 예정이다.

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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