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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페더러와 미국의 속전속결 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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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정현 선수를 꺾고 우승까지 차지한 로저 페더러는 만 36세. 전성기는 20대 초·중반이었다. 당시 페더러의 전법은 지금과 판이했다. 면적이 작은 라켓으로 정교한 샷에 치중했다. 베이스라인 뒤편에서 뿜어대는 그의 송곳 샷에 상대방은 랠리 몇 번 하다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테니스 라켓의 급격한 기술 발달로 페더러와 한 포인트에 30회 이상 랠리를 이어가는 선수들이 속속 등장한 것. 30대 초반에 들어서자 시합이 길어질수록 코너에 몰렸다. 체력을 아껴야 했다. 결국 전법을 180도 바꿨다. 10년 동안 쓰던 라켓을 버리고 헤드 넓이 97제곱인치, 340g짜리 큰 라켓으로 바꿨다. 정교한 랠리에서 ‘속전속결’로 스타일을 전환한 것이다. 서비스게임에선 강한 서브를 넣은 뒤 코트 앞으로 돌진해 포인트를 따냈다. 서브할 때 공 튀기는 횟수도 다른 선수의 절반으로 줄였다. 랠리도 10구 이상 끌지 않았다. 3구, 5구 정도에서 승부를 걸었다. 버릴 게임은 과감히 포기했다. 평균 3~4시간이던 경기 소요시간은 2시간 이내가 됐다. 그러자 화려하게 부활했다. 버리기 힘든 강점을 과감히 희생하고, 기존 성공 방식에 매달리지 않은 결과다.

경기 질질 끌지 않고 빠른 승부로 부활 #‘미국 우선주의’ 명분 속도전 경계해야

페더러의 변신은 미국의 대북전략과 오버랩된다. 미국은 기존 방식으로 북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대응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외교력을 바탕으로 정교한 제재와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는 정공법을 쓸지, 혹은 완전히 새로운 군사전략인 ‘속전속결’을 택할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워싱턴의 기류를 종합할 때 최종 판단은 평창올림픽 기간이나 그 직후에 이뤄질 공산이 크다.

정공법을 주장하는 이들은 ▶북한 핵시설 장소를 특정하기 힘들고 ▶설령 발견한다고 해도 군사행동 시 전면전으로 번질 것이고 ▶그 경우 50만 명 이상이 희생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이 군사작전에 동의할 리 없다고도 한다. 이에 반해 ‘속전속결파’는 ▶축적된 정보를 통해 이미 북한 내 주요 미사일 시설은 물론 이동식 미사일발사대 위치도 파악했고 ▶현 미군 능력이면 희생자가 다수 나오기 훨씬 전에 북한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선 “미사일 기지를 제한적으로 타격할 경우 북한은 결코 (한국에) 반격하지 못할(않을) 것”이란 가설이 강하게 대두하고 있다. 반격하는 순간 망하는 걸 알기에 북한 주민들에겐 폭격 사실을 쉬쉬하며 협상 등 제3의 길을 모색하고 나설 것이란 주장이다. ‘미 선제공격→북한 반격’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우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생각이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이유가 100가지 있어도 딱 한 가지, 대통령 결심 하나로 움직이는 나라가 미국이다. 결국 북핵 최종 해법 또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의해 결정될 공산이 크다. 그게 비논리적·비합리적·비상식적일 수 있다는 건 최근 한국산 태양광·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발동에서 우린 이미 확인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또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갈수록 노골화하는 우리의 ‘북한 우선주의’를 비논리적·비합리적·비상식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부 장관이 올림픽 개막식 전날(2월 8일)로의 조선인민군 창건일 변경 및 5만 명 열병식을 “우연히 날짜가 겹친 것”이라 옹호하는 판이니 말 다 했다. 미국의 인내는 비등점으로 치닫고 있다. 전법을 바꿀 그들 나름의 명분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속전속결이 아무리 비상식적이어도 우리로선 막을 도리가 없다. ‘지금’의 신중함이 극도로 중요한 이유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