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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 감독 "다 버려" 매직, 마음 비운 최재우 다시 날다

중앙일보

입력

모굴 스키 국가대표 최재우. 김경록 기자

모굴 스키 국가대표 최재우. 김경록 기자

"Just ski your run!(하던 대로만 타면 돼)"

토비 도슨(40) 감독이 프리스타일 스키 모굴 국가대표 최재우(24·한국체대)에게 틈날 때마다 들려주는 '마법의 주문'이다. 도슨 감독은 3살 때 미국 콜로라도의 스키 강사 부부에 입양돼 미국에서 성장한 스타 출신 지도자다. 2006 토리노 겨울올림픽 모굴 동메달리스트로 미국 스키·스노보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뿌리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에 건너왔고 2011년부터 한국 모굴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모굴 스키는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눈 둔덕을 넘으며 회전기술, 공중연기, 속도를 보여주는 종목이다.
최재우는 도슨 감독이 '될성부른 싹'으로 첫 손에 꼽은 기대주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은 건 스승과의 공통점이다. 네 살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해 초등학생으로 여러 종목에서 1등상을 휩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캐나다 휘슬러로 스키 유학을 떠나 4년간 머무는 동안 실력이 더욱 늘었다. 재능을 알아본 캐나다 스키협회 관계자가 "귀화를 고려해보라"는 제의도 했다고 한다. 최재우는 대한민국 국적을 지켰다. 지난 2009년 15세에 설상 종목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2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만난 최재우는 "언제 가장 잘 했는지, 가장 즐겁게 했는지 돌아보니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3위에 오른 고2 때였다"고 했다. 그는 "성적 부담이나 경쟁의식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스키 자체가 좋았다"고 했다.

모굴스키 국가대표 최재우가 지난해 강원도 평창 휘닉스 평창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한 뒤 포즈를 취했다. 평창=박종근 기자

모굴스키 국가대표 최재우가 지난해 강원도 평창 휘닉스 평창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한 뒤 포즈를 취했다. 평창=박종근 기자

최재우는 이어 "평창올림픽에서 거창한 결과를 기대하는 분들이 많은데, 내가 지금 바라는 건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라면서 "도슨 감독님이 '다 버리고 내려놓으라'고 강조하신 게 어떤 의미였는지 요즘 비로소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년간 최재우의 성적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출발은 좋았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12위에 올랐다. 한국 스키 사상 최고 성적이었다. 이듬해 1월 미국 디어밸리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모굴 월드컵에서 4위에 올랐다.
평창올림픽 설상 기대주 0순위로 주목받았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달 뒤 훈련 중 착지 실수로 등을 다쳤다.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대회에 나섰다가 또 다쳤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이런 악순환이 계속됐다. 그의 랭킹은 나날이 떨어졌다. 그러다 도슨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여 '내려놓기'를 선택했다. 그저 스키가 좋아 스키를 타던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되찾기로 했다.
머리를 깨끗하게 하려 했다. 술과 친구를 끊고 차도 팔았다. SNS도 그만뒀다. 동료들이 쉴 때 태릉선수촌에 가 여름 종목 선수들과 함께 운동했다. 최재우는 "태릉은 기운부터 다른 공간이었다. 레슬링과 유도, 태권도 선수들의 훈련은 지켜만 봐도 숨이 찼다. 복싱, 배드민턴, 빙상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훈련에 매진했는지 돌이켜봤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감독과 제자로 처음 인연을 맺은 직후의 최재우(왼쪽)와 토비 도슨 감독.

지난 2012년 감독과 제자로 처음 인연을 맺은 직후의 최재우(왼쪽)와 토비 도슨 감독.

지난해부터 부활 드라마가 시작됐다. 삿포로 겨울아시안게임 은메달이 신호탄이었다. 이후 월드컵에서 세 차례 4위에 올라 올림픽 메달권에 다가섰다. 지난 11일 디어밸리 월드컵 1차 예선에서 '세계 최고수' 미카엘 킹스버리(캐나다)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결선에서는 착지하다 넘어져 실격됐지만,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최재우는 "아주 스펙터클하게 넘어졌는데 자세를 잘 유지한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며 활짝 웃은 뒤 "예선에서 1위를 한 뒤 짜릿한 흥분에 온몸이 떨렸다"고 회상했다. 최재우는 "도슨 감독님이 '수고했다'며 꽉 안아줬는데 평소 그런 스타일이 아니셔서 당황했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함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최재우가 금메달을 목에 걸려면 킹스버리를 넘어야 한다. 모굴 월드컵 통산 48승을 거둔 절대 강자다. 킹스버리의 이름을 언급하자 최재우가 씩 웃었다. "(킹스버리를 이기겠다는) 자극적인 답을 원하는 걸 잘 안다. 솔직히 말해 '금메달을 반드시 목에 걸고 싶다'고 외치고픈 마음도 있다. 그러나 철저히 나 자신과의 대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에 대한 경쟁심이 집중을 방해하지 않도록 오히려 마음을 좀 더 비우겠다"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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